[6월 소식] #대전서구 #대전서구소식 #6월소식


글ㅣ배다솜 / 사진 한상훈

호국보훈의 달 특집

전쟁터의 죽음을 넘어온 삶,

그날의 석양을 기억하는 윤영덕 참전용사

▲ 윤영덕 상이군경회 대전광역시 서구지회장

6월,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삶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고자 참전 용사인 윤영덕 상이군경회 대전서구지회장을 만났다. 그가 참가한 베트남전쟁은 한반도 밖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당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는 조국을 위한 또 하나의 전장(戰場)이었다. 1972년, 총알이 빗발치던 밀림에서 포로를 인수하러 나갔다가 전우들을 잃고 피범벅이 된 채 하수구에 몸을 숨기던 밤. 그는 결국 살아남았고, 돌아와 평생 전우들의 몫까지 살아내고 있다. 영원한 우리의 영웅, 참전 용사 윤 회장의 역사를 들어본다.


전쟁터로 떠난 스물한 살의 청년

▲ 월남전 파병 당시 윤영덕 회장의 모습

1972년 1월 17일, 겨울 바람이 스산하던 부산항. 스물한 살의 청년 윤영덕은 12층짜리 배에 몸을 실었다. 듣도 보도 못했던, 마치 섬 같았던 거대한 배가 전쟁터로 떠나는 대한민국의 청년 2,000명으로 꽉 차 있었다. 오륙도 앞바다 너머 석양이 붉게 물들던 그날, 그는 생각했다. “과연 내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윤 회장은 월남전에 헌병으로 파병됐다. 전투지에서 헌병은 전투병과 다름없었다. 전투부대가 포로를 잡으면, 방탄조끼를 입고 작전지에 들어가 포로를 인수하고 심문했다. 총성이 멈추지 않는 작전지 한복판에 서 있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마다 ‘살아 돌아가야지, 살아야지’하는 생각뿐이었다. 전쟁터는 그에게 공포의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로 남아 있다.

적들의 발소리 옆에서 숨죽였던 밤

당시에는 아무리 포로를 이송해야 하더라도 해가 지면 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작전 중 해가 졌고, 어두운 밀림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차량이 B-40 로켓에 저격당한 것이었다. 함께 있던 중사와 운전병, 포로들은 즉사했고, 그는 복부에 파편상을 입은 채 홀로 살아남았다.

피를 흘리며 기어 들어간 하수로 안에서 밤새 숨죽여야 했다. 로켓을 발사한 적들이 찾아와 동료들을 확인 사살하는 소리, 주변을 수색하는 소리 속에서도 그는 버텨야 했다. 공포 속에서 해가 떴고, 그는 정신을 잃은 채 구조됐다. 7일 간 사경을 헤매던 그는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는 먼저 간 전우와 선배들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흉터도 희미해졌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전쟁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선 안 됩니다. 나보다 더 많이 다친 전우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 그 이름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라를 위한, 후손을 위한 일생

▲ 월남전 파병을 가는 대한민국 군인.

베트남전쟁 자료사진

윤 회장은 국가 경제를 위한 파병이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GDP도 낮고 외교도 제 역할을 못했지요. 베트남 수상을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파병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암담했을 겁니다.” 외교부에 따르면 당시 1964 ~1973년까지 9년 동안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우리나라는 모두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어려웠던 국가 경제를 위해 수많은 젊은 청춘이 몸을 던진 것이다.

윤 회장은 전역 후 부산 국제시장에서 베 짜는 사업을 시작했다. 작은 직기 4대로 시작해 공장 규모를 키워냈고, 경남 양산에 큰 공장을 일궈냈다. 그는 말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사람이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 치열하게 살았어요.”

그는 자신보다도 가족을, 후손을 먼저 생각한다. “아들은 공군사관학교 45기 출신입니다. 고등학생 때 갑자기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하더군요.”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그에게 그의 후손이 또 다시 군인의 길을 걸어 가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고민 없이 응원했다고 말했다. 본인의 삶에서 얻은 게 많았기에, 아들이 그 삶을 따라온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전쟁의 공포와 절망, 누구도 겪지 말아야

고엽제 피해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당시엔 그 약품이 위험한 줄 몰랐다.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물을 맞으면 모기가 달라붙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서 다들 그걸 온몸에 바르고 다녔다. 나중에야 그 약품이 미국에서 수입된 독성 제초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기를 피하겠다고 온몸에 발랐던 사람들은 아마 다 이 세상에 없겠지요. 우린 다 고엽제가 고여있던 물을 마시고, 고엽제가 흠뻑 묻은 풀 옆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피해자였습니다.”

그는 현재 대전시 서구 상이군경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의 보훈제도에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후손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릴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현충일 행사에 학생들이 점점 안 옵니다. 우리가 겪은 일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은 말로 듣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 공포, 그 절망, 그 안에서의 희망… 젊은 세대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랍니다.”

그는 오늘도 보훈회관 앞에서 무심코 ‘이곳은 어떤 곳이에요?’ 하고 묻는 이에게 답한다. “이곳은 나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쉬는 곳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배를 타고 파병을 가던 그날의 석양을 기억한다. 살기 위해 기어 들어간 하수로 속의 밤을 기억한다.

리는 그의 기억에 담긴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 블로그 발행글은

"대전광역시 서구청 소식지"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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