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시대를 다시 보다

충남 공주시 웅진동 57-1


공주는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도시 전체가 작은 역사 박물관 같습니다.

오늘은 웅진백제역사관을 찾았습니다.

웅진백제역사관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요?

▲ 웅진백제역사관

공주는 지방 도시라서 그런지 어딜 가도 여유롭습니다.

제가 느끼는 '여유롭다'는 의미는 주차장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밀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다 그렇지는 못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밀도가 낮은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웅진백제역사관 가는 길도 그렇습니다.

주차장도 물론 여유가 있었고, 웅진백제역사관 가는 길도 천천히 걸어서 찾아가는 길이라 좋았습니다.

하늘에 구름은 좀 많았지만 외부 활동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 무령대왕

역사관 안에 들어가는 무령왕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공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왕입니다.

그만큼 웅진 시대에서 빠질 수 없는 대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천도

"천도" 웅진으로 가는 길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숨지면서 고구려는 수세에 몰렸다. 그런 국력을 키운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백제의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에게 신하의 맹세를 받아내며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는 성을 쌓고 중국 북위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475년 9월, 고구려는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혼란한 상황에서 왕위를 이어 받게된 문주왕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중심이 될 새로운 수도를 찾아야 했다.

이 공간은 백제사의 중요한 사건을 알려주는 타임 라인 그래픽과 역사관 관람을 위한 주요 키워드로 채워진 공간입니다.

이곳을 살펴보면 백제가 한성 도읍기를 거쳐 웅진 도읍기를 지나 사비 도읍기에 이르고 그 시기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왕도웅진

"왕도웅진" 백제의 새로운 중심지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찾은 곳이 바로 지금의 공주, 당시의 웅진이었다. 웅진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적들이 들어오기 어려웠고, 멀리 계룡산의 산줄기도 고구려와 신라를 막아주었다. 더 남쪽으로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의 넒은 평야가 가까웠고, 곡식을 실은 배가 움직이기도 좋았다. 게다가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오갈 수 있었다.

이렇게 환경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웅진에는 이미 백제 왕실과 친밀한 사이에 있던 강력한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쫓기듯 한성을 떠나온 백제 왕실이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선택한 가장 좋은 터전이 바로 웅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왜 백제의 두 번째 수도를 웅진으로 정했는지 그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로서 가장 좋은 선택지인 웅진에 백제가 자리 잡게 됩니다.

▲ 다섯 왕

전시실 안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는데 웅진의 건설 이야기를 화면으로 흥미롭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다섯 왕들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섯 왕들은 누구인지 어떤 업적이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웅진도읍기의 왕들

천혜의 요새이자 왕실을 지지할 굳건한 세력이 존재하던 웅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문주왕,

어린 나이였지만 귀족 세력을 억누르려 노력한 삼근왕, 서남부로 영토를 넓히고 국경 방어를 강화한 동성왕,

사회를 안정시키고 중국 왕조와 다시 교류하며 강국임을 선언한 무령왕,

영토 확장과 번영을 꿈꾸며 보다 넓은 사비로 천도한 성왕까지 웅진 도읍기 백제의 기틀을 다지고

부강한 나라로 재탄생 시킨 다섯 왕들의 이야기.

▲ 갱위강국

"갱위강국" 왕도 웅진이 되살아난 백제

갑작스런 천도로 백제의 지배 세력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새 바람이 불었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고, 성을 축조하여 국경을 방어했다.

고구려 때문에 북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워지자 남쪽의 영산강과 섬진강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백성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었고,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재개되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백제만의 고유 문화로 재탄생 시켰다. 수도가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으나 웅진에서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백제, 그 흔적은 지금도 공주 곳곳에 남아있다.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될 때 백제의 문화가 다시 살아남을 알 수 있습니다.

▲ 문화강국

"문화강국"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중국과 오가던 항로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로를 회복하고 동아시아에서 중심 국가로 부상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불교, 도교와 함께 도자기, 기와 등의 제작 기법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이러한 새로운 문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만의 문화를 꽃 피웠고, 그것을 일본으로 전해주었다. 백제 문화는 일본 문화의

원류가 되어 그 문화 수준을 끌어올렸다.

이곳에서는 백제의 바닷길과 문화의 교류, 무령왕릉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속 유물이 남아있는 백제인들의 장인 정신, 그리고 백제인들이 꿈꾸었던 이상 세계를 보여 주는 공간입니다. 백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 백제인들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백제인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대부터 꾸준히 중국, 일본 등 바다 건너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며 발전하였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했던 어려움 속에서도 백제인들의 개척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향한 겸익에서부터 일본에 공예 기술을 전한 다리 일족까지 고향을 떠나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던 백제인들을 살펴보자.

국제 무대에서 활양한 백제인들은 그림과 함께 활약상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어떤 백제인들이 어떤 활약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단양이

오경박사란 유교의 다섯 경전인 "시경, 서경, 역경, 예기,춘추"에 능통한 사람들을 부르던 말이다.

일찍 유학을 받아들인 백제는 단양이 뿐만 아니라 고안무 왕유귀 등을 일본에 보내어 유학을 전파했다.

단양이는 일본 사람들에게 유학과 한문을 가르쳐 일본의 학문 발전을 도왔다.

다리와지리

다리는 백제 무령왕 때의 장인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가 그의 작품이다.

백제에서는 각종 물건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를 키워내었고, 이들의 후손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 기술을 전했다.

다리의 후손인 지리는 일본 아스카데라의 대불과 호류지의 석가삼존상을 만들었다.

백제의 불교 예술은 일본 불교 미술품의 모델이 되었다.

겸익

백제 성왕 때의 승려로, 불교를 깊이 공부하고자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에 건너갔다. 상가나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 율부를 가지고 돌아와 백제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지금 인도의 날란다 사원이 겸익이

공부했던 상가나사로 추측된다.

고달

백제의 관리이다. 개로왕과 동성왕 때 사신이 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동성왕은 그 활약상과 성실함을 칭찬하고 중국 남제에게 청하여 대방태수로 임명 받게 하였다.

고달의 활약은 백제의 활발했던 국제 교류를 잘 보여준다.

수수허리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양조 기술을 전파한 인물이다.

일본의 옛 기록인 <고사기>에는 백제에서 건너온 수수허리가 대어주를 만들어 일본 왕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당시 백제에서는 중국처럼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겸익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름 없는 백제인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백제에 들여오고 또 다른 나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들은 그만큼 위대하겠지만 이렇게 이름 없는 사람들도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서 문화가 조금씩 발전했을 것입니다.

▲ 쉬는 공간

마지막 나오는 곳에는 현재의 공주의 모습들이 있는 사진들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북 카페가 있었습니다.

북 카페에서는 책도 구비 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앉아서 쉬어갈 수 있습니다.

웅진 백제역사관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웅진 시대를 열어갈 때 어떤 왕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짧지만 굵게 백제 웅진시대의 역사 공부를 한 느낌입니다.

어른들이 둘러봐도 좋지만,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서 백제 웅진 시대를 같이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웅진백사역사관

○ 주소: 충남 공주시 왕릉로 37

○ 전화: 041-840-2226

○ 휴관일: 1월1일(신정), 설·추석(명절) 당일

* 취재일: 2025. 06.21.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별이님의 글을 재가공한 포스팅 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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