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전
전북 역사 기행 - 송병선과 호남의병 이야기
조선의 마지막 좨주
송병선
올해는 ‘푸른 뱀의 해’라고 하는 을사년(乙巳年)입니다. 동양 사상에서 을사년의 을(乙)은 ‘청색’을, 사(巳)는 ‘뱀’을 의미하는데 을(乙)은 ‘나무’로도 해석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력과 성장’을 상징하는 나무와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지혜로운 동물’인 뱀의 의미가 결부되어, 을사년은 ‘새로운 시작’ 또는 ‘지혜로운 변혁’이나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해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을사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이름만으로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을씨년’이라는 말 그 자체가 바로 일본 제국이 강제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1905년의 ‘을사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11월 17일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로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을 가리켜 ‘을사년에 일어났고 또 일방적인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어진 조약’이라는 의미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합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 지푸라기)처럼 버린 우국지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한 분이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좨주(祭酒)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선생이십니다.
좨주는 조선시대에 당대의 유학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에게 부여하던 직책인데, ‘학행이 다른 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을 뽑으라고 법전에 명시되어 있었다. 특히 1658년(효종 9)부터는 정3품 당상관으로 좨주의 품계를 올리고,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교장 역할) 직도 겸하게 하여서, 좨주는 당대의 유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직함이었다. |
송병선은 누구인가?
송병선은 자(字: 성인이 된 후 부르는 이름)가 화옥(華玉)이고 호(號: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호칭)는 연재(淵齋)이며, 1836년(헌종 2)에 회덕현(懷德縣: 헌재 대전시 북부 지역)에서 아버지 송면수(宋勉洙)와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큰아버지 송달수(宋達洙)와 작은아버지 송근수(宋近洙)를 통해 9대조 할아버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풍을 이어받았습니다. 따라서 송병선은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송능상(宋能相)-송환기(宋煥箕)-송이규(宋穉圭)-송달수(宋達洙)로 이어지는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정통 성리학을 계승(繼承)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연재학파(淵齋學派)라는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였습니다.
송근수(宋近洙, 1818~1903)는 좌의정을 지내고, 순종황제(純宗皇帝)와 함께 종묘(宗廟: 국왕들의 사당)에 배향(配享: 함께 모시는 것)된 공신(功臣)이다. 조선시대에 종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문묘(文廟: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는 것 다음으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욱이 송근수는 좨주도 역임하였으므로 당대 최고의 명예를 누린 인물이었다. |
송병선은 아우 송병순(宋秉珣, 1839~1912)과 함께 훌륭한 스승들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1865년에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毁撤: 건물을 철거함)하라는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이 내려지자, 이 사건을 송시열이 강조했던 춘추의리(春秋義理: 불의에 맞서는 것) 정신의 파괴로 간주하고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송병선 형제는 재야에 은거하면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고종 임금은 계속 관직과 하사품을 내리면서 송병선 형제를 예우하였습니다.
고종 임금의 예우에도 불구하고 송병선은 단 한 차례도 고종 임금과 만나지 않았지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고종 임금에게 알현을 청했습니다. 알현을 청하기에 앞서 을사늑약을 맺은 5명의 역적들을 목베어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지만, 응답이 없자 직접 만날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고종의 허락을 받아 알현한 자리에서 송병선은 다시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폐기를 청하였는데,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하자 자결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결심을 실행하기 전에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와 일본 순사에 의해서 입궐하기 전부터 자결 목적으로 소지했던 칼과 독약을 빼앗기고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회덕으로 보내졌는데, 결국 그로부터 4일 뒤인 을사년의 마지막 날(음력 12월 30일)에 송병선은 치사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했습니다.
송병선의 자취가 남아 있는 낙영당과 이산묘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운명이 기울어가고 있던 시기를 살았던 송병선은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 및 동학(東學)의 발흥을 지켜보면서 ‘나라가 없어지면 도(道) 역시 망한다’는 신념으로 전국 각지를 다니며 무너져가는 성리학의 진흥을 위해 애썼는데, 특히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에 속하는 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송병선은 1876년 임피현의 고봉산(현재 군산시 개정면)에 낙영당(樂英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어머니의 묘를 임피의 축성산으로 이장한 이듬해인 1892년에 임피현령(臨陂縣令) 조원하(趙爰夏)와 함께 지역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임피향약(臨陂鄕約)을 제정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묘를 축성산으로 이장한 이듬해인 1901년에는 임피향교에서 강회(講會)를 여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우국지사들을 낙영당으로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열었습니다.
당시 임피를 다녀간 인물들 중 최익현(崔益鉉)ㆍ기우만(奇宇萬)ㆍ고광순(高光洵)ㆍ기삼연(奇參衍)ㆍ전해산(全海山) 등은 송병선의 자결 후 의병장이 되어 전국에서-가장 강렬한 의병활동을 벌인-호남의병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또한 송병선은 1900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 진안군의 마이산을 찾았는데, 1907년에는 이곳에서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을 비롯한 진안ㆍ임실ㆍ순창ㆍ장수ㆍ남원 등지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의병들이 구국을 위한 무장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호남의병창의동맹(湖南義兵倡義同盟)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1925년에 송병선과 최익현의 제자들은 이곳에 두 스승과 조선 태조를 위한 이산사(駬山祠)라는 사당을 지었는데, 광복 후 이곳은 유림(儒林)의 중론에 따라 이산묘(駬山廟)로 승격시키고,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열사들 34인과 본받을 만한 삶을 산 유학자들 40인, 그리고 세종대왕 및 고종 임금을 모시는 사당이 되었습니다.
국가 명승 일사대와 서벽정
송병선은 임피에 낙영당을 짓고서 10년 후인 1886년에 무주군 설천면[당시는 무주도호부]에 다시 서벽정(棲碧亭)을 건립했는데, 굳이 무주의 외진 곳에 서벽정을 지은 이유는 상세한 기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송병선이 남긴 시에서 서벽정 주변의 절경을 만족해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 자신이 평생 흠모했던 송시열이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속리산 화양동계곡에 암서재(巖棲齋)라는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거나 수양을 위해 마련한 집)를 지은 것처럼, 송병선도 송시열을 오마주(hommage)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송병선이 서벽정을 세운 설천면 두길리 지역은 2009년에 ‘무주구천동 일사대 일원(茂朱九千洞 一士臺 一圓)’이라는 명칭으로 국가유산인 명승이 되었는데, 그 이름은 송병선이 이름을 붙인 일사대(一士臺)라는 바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송병선은 스스로를 동방일사(東方一士: 조선의 한 선비)로 칭했는데, 서벽정 서쪽에 우뚝 솟은 배의 돛대모양 바위를 가리켜 일사대(一士臺)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혹시 올해 을사년을 맞아 역사기행을 할 계획이 있으시다면, 송병선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경로를 추천합니다.
글, 사진 = 최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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