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문 곳

예산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7-13


충남 예산군 덕숭산 자락을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초가집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수덕여관, 그저 옛 여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특별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곳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닙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예술가들이 꿈을 키우고,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성지 같은 공간입니다. 지금도 그 옛날 예술가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곳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수덕여관

▣ 예술가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수덕여관은 한국 근현대 예술사의 산증인입니다. 이곳에서 나혜석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김일엽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응노는 세계적 화가로 성장하는 예술혼을 키웠습니다.

본래 비구니 스님의 거처였던 이 초가집은 1944년 이응노 화백이 매입하면서 예술가들의 성지로 거듭났습니다. ㄷ자형으로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12개의 방 곳곳에는 지금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가 되기도 했던 이곳은,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모두 품고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여관 곳곳을 둘러보면 각 방마다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낡은 문고리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예술가들이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고민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던 그 순간들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 수덕여관

▣ 나혜석의 마지막 이야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의 여성 잡지 편집자... 하지만 그 빛나는 이력 뒤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숨어 있습니다.

자유연애를 실천하고, 여성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했던 그녀는 당시 사회에서 '불륜녀'로 낙인찍혔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마저 떠나보낸 그녀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수덕여관이었습니다.

▲ 수덕여관

수덕여관에서 나혜석이 보낸 시간은 그녀 인생의 마지막 장이었습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받은 채 이곳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며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야기는 예술가의 고독과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여관의 작은 방 한 켠에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들과 글귀들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한 여성의 절규이자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곧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나혜석이 머물렀던 방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면, 그녀가 마지막까지 바라본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덕숭산의 푸른 산세와 고즈넉한 사찰의 정취가 어우러진 이 풍경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위로를 주었을지 생각해봅니다.

▲ 수덕여관

▣ 이응노의 예술적 유산

세계적 화가 이응노가 남긴 가장 특별한 선물이 바로 여관 뒤뜰 너럭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입니다. 1969년 그가 직접 새긴 추상문자 두 점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그의 예술철학이 담긴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응노는 1944년 이곳을 매입한 후 화실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많은 작품들이 이 조용한 초가집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수덕여관의 예술사적 가치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바위 앞에 서서 그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화가가 붓 대신 정을 들고 바위와 마주했던 그 순간의 치열함이 전해집니다. 아마도 그는 종이나 캔버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바위에 새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지금도 바위 위 글씨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이응노가 사용했던 화실을 둘러보면, 그의 작업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붓을 들고, 어떤 작품을 구상했을까요? 그의 유명한 '군상' 시리즈나 '문자추상' 작품들의 영감이 이곳에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 수덕여관

▣ 김일엽의 깨달음

여성운동가에서 비구니로 변신한 김일엽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수덕여관에서 출가한 그녀는 이곳에서 종교적 사색을 이어가며 의미 있는 산문들을 남겼습니다.

김일엽은 신여성 1세대로서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택했을까요? 그 답은 수덕여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아를 찾았고, 내면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전통과 근대, 여성의 자각과 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온몸으로 살아낸 그녀의 흔적이 여관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김일엽이 앉아서 명상하고 글을 썼을 법한 조용한 마당 한 켠에서, 그녀가 찾았던 그 깨달음의 순간을 함께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출가는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 수덕여관

▲ 수덕여관

▣ 시대의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공간

수덕여관은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닌,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저항문학가들이 은밀히 모여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가 되었습니다.

각 방의 벽과 기둥, 마루에는 그 시절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남긴 낙서, 손때 묻은 문고리,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서까래들... 이 모든 것이 수덕여관만의 특별한 매력입니다.

여관의 안마당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왜 이곳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즈넉한 사찰의 정취와 자연이 어우러진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고요함이 있습니다.

▲ 수덕여관

▣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수덕여관과 수덕사를 둘러보는 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닙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의미 있는 여행입니다.

나혜석이 걸었던 길, 이응노가 영감을 얻었던 바위, 김일엽이 깨달음을 얻었던 사찰... 이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입니다.

각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미리 공부하고 방문하면 더욱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삶을 알고 이곳을 걸으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과 함께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수덕여관

▣ 현재의 수덕여관

지금의 수덕여관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숙박시설로는 운영되지 않지만,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습니다.

여관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 작품 활동에 필요했던 도구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 사진들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 수덕여관

여관 인근 박물관에서는 이응노 화백의 동양화와 서양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예술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군상' 시리즈와 '문자추상'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수덕여관에서의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수덕여관

▣ 방문객을 위한 특별한 체험

수덕여관에서는 단순한 관람 외에도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통 차 체험, 서예 체험, 그리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 프로그램 등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해설 프로그램은 꼭 참여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전문 해설사가 들려주는 예술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건물을 구경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 수덕여관

▣ 주변 볼거리와 맛집

수덕여관을 둘러본 후에는 주변의 다른 볼거리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덕숭산 둘레길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합니다.

예산 지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사과와 밤을 활용한 요리들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수덕사 주변의 전통 사찰음식점에서는 정갈하고 담백한 한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 여행 팁

  • 관람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

  • 입장료: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

  • 추천 코스: 수덕여관 → 수덕사 대웅전 → 덕숭산 둘레길 산책 → 주변 맛집

  • 포토 스팟: 이응노 암각화, 수덕사 대웅전 측면, 수덕여관 안마당, 사찰 전경

  • 방문 시기: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가을 단풍철과 봄 벚꽃철이 추천

  • 주의사항: 사찰 내에서는 조용히 관람하고, 사진 촬영 시 플래시는 사용하지 않기

▣ 마무리하며

예산 수덕여관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닙니다. 예술가들의 삶과 고뇌, 그리고 우리 역사의 아픔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긴 특별한 공간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천천히 걸으며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보세요. 나혜석의 마지막 붓질, 이응노의 치열한 예술혼, 김일엽의 깨달음의 순간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깊은 울림을 남길 것입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예술가들의 정신과 그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입니다. 수덕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여러분도 그 특별한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 취재일 : 2025년 7월 5일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여행하는 그리니님의 글을 재가공한 포스팅 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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