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창호문에 새겨진 역사

50년 손길로 이어지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장생동로 239-9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입니다.

이 글은 충청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 중 한식창호 안광오 명인의 인터뷰 글입니다. 명인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합니다.

▲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식창호 안광오 충청명인

▲ 안광오 충청명인의 작품 '팔각불갈기창'

목공인의 손길로 빗어지는 작품

목재를 만지는 일은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어 감정을 타고 올라 온몸을 휘감고, 결국 나를 몰입하게 만드는 지난한 작업입니다. 코피가 나고, 손가락을 다치고, 날카로운 연장이 나를 위협할지라도 나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잠든 밤, 작업실에서 빛나는 작은 전구에 의지한 채, 목재를 깎는 일은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라 그럴까요. 내가 만든 하나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그로 인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 안광오 명인의 작품 '목단 꽃살문'

눈을 감으면 나의 손길로 생명이 불어 넣어진 작품들이 하나하나 기억에서 되살아납니다.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원과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한국어강의실 창호문. 강의실 창호문은 당시 뉴욕타임스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송출되기도 했습니다. 이 방송으로 인기 야구인 강정호 선수로부터 가운을 선물 받기도 했습니다.

국내의 경복궁과 창덕궁 또한 나의 손을 거쳐 간 곳입니다. 대한민국 사찰 중에서는 대웅전 창호문은 주로 나의 손을 거쳐 간 곳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인 '구인사' 조사전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목재를 사용하여 만든 곳입니다.

▲ 안광오 명인의 작품 '여러가지 꽃살문'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

1958년 4월,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7남매 중 셋째 외아들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던 터라 사회적으로 심각한 가난에 직면해 있었지요.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인프라 파괴, 인구 이동, 그리고 많은 이재민 발생 등으로 경제는 극도로 위축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우리 집은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서 다리를 조금만 건너면 지금의 서산공업고등학교가 자리 잡은 곳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점심시간이 되면 집으로 달려가 밥을 먹곤 다시 학교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지루했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당시만 해도 아주 컸던 장옥(시장)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종일 뻥튀기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꼭 발길을 멈추어 뻥튀기 아저씨 옆에 서서 주위를 빙빙 돌곤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입에 손을 갖다 대면 ‘뻥이요~’라고 외치면, 나는 양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그 소리는 워낙 커서 귀청이 다 떨어질 정도였으니까요. 하얀 연기와 함께 주위에 흩어지는 옥수수, 보리, 콩, 떡국 등의 튀밥은 배고픈 어린 소년을 황홀케 했습니다.

▲ 청년시절의 안광오 명인

땅을 빼앗긴 우리 집, 가세가 기울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습니다. 아버지는 서류 없이 동네 사람에게 땅을 사서 경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그 땅을 빼앗기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문서 없이 부동산을 사고파는 일이 흔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는 발버둥 쳤고, 동네 사람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경찰서에서도 “증거도 없는데 너희 땅이냐”라며 아버지를 학대하였고요.

결국, 아버지는 며칠 동안 크게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동네 둑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온 그 날부터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는 그렇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4월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우리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도무지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그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아침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기위해 채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멀찍이 떨어져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자들은 상여를 따르지 못하는 불합리한 시대란 걸 저는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땅에 묻힌다는 슬픔보다 더 큰 분노가 자리 잡았습니다. 상황이 주는 사회의 불합리함이 어린 저를 괴롭히더군요.

여자였던 어머니와 누나 둘, 여동생 넷을 뒤로하고, 혼자서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그 부조리한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를 오롯이 느끼면서 말이지요.

아버지의 관에 흙이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나는 속이 상해 슬프기보다는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권리가 왜 남자에게만 주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겨진 채 울고 있을 내 사랑하는 가족들.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떠나갔음에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은 내 안에서 여전히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불합리한 사회규범과 규정이 사람들의 감정을 얼마나 상처 입힐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슬픔과 그 슬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 속 괴리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를 절실히 알게 되었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 작업사진

산에서 위안을 받고 상처를 치유한 나

가난한 집안을 이끌어간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시장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며 자식 일곱을 키우셨습니다. 자식들을 많이 가르치고 싶었던 어머니의 바람은 곤고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상급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대충 챙겨 먹은 한 끼가 하루의 시작이었고,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무를 하려는 심산이었지만, 사실은 친구들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피하고자 숨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시절. 그곳에서 나는 종일 잠을 잤고, 배가 고프면 산나물을 뜯어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서산마루에 해가 걸릴 무렵이 오면은, 허겁지겁 땔감을 한가득 지게에 얹고,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겨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나는 땔감을 장에 내다 파는 나무장수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몰래 산으로 피하곤 했던 저였습니다. 그곳에 올라가면 맘이 편했거든요. 애꿎은 나무를 툭툭 치기도 했고, 나무 둥치를 두 팔로 감싸며 눈을 감고 킁킁 냄새를 맡는 일로 위로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나무는 가난으로 인해 내게로 다가온 친구이자, 평생을 함께할 운명임을 가르쳐줬나 봅니다.

▲ 작업사진

꼬마 심부름꾼, 나무를 만나며 ‘위로’를 받다

동네 형은 목공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아들이 걱정되어 “밥이라도 배불리 먹게 해달라”며 형에게 나를 부탁했지요. 그때는 이 일이 내 평생의 삶이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여미리목공소 꼬마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기술을 가르친다는 명목 아래 3년을 무보수로 다녔지요. 맞기도 참 많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버텨야 했던 날들이었지요. 그나마도 명절이면 돼지고기를 끊어주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순간이 쌓여 나를 형성했고, 나무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토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삶의 무게 속에서도 나무의 향기 안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게 가장 큰 보상이었지요.

▲ 작업사진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목공인의 삶

열 아홉 살,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새롭게 펼쳐지던 순간입니다.

목공소 사장님이 내게 처음으로 나만의 연장을 사주시며 “너는 이제 기술자니, 이제 떠나도 된다”는 말씀과 함께 기술자로 삽교목공소에 취직을 시켜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처음으로 떨어지다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얼마나 달려가 안기고 싶을까요. 그렇지만 집안의 가장으로 마냥 심부름꾼 생활은 언감생심 아니잖아요.

▲ 안광오 명인의 작품 '목어'

내 두 번째 직장에서의 첫 출근은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터전은 낯설었지만, 그곳의 연장들은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로운 기회를 약속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한 꼬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어린 친구의 눈빛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 같았습니다. 그 녀석 또한 나처럼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심부름꾼이었지요. 가슴 한쪽이 바늘로 찌르듯 아리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어제의 나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어 울컥하더군요.

그 아이에게 참 잘 해주었습니다. 힘든 일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애썼지요. 그가 나처럼 힘겨운 과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목공인의 삶을 살아나갔습니다.

▲ 두 누이와 여동생

보고 싶은 가족들, 열심히 살아야 했던 이유

지금도 눈앞에 선명합니다. 객지에서의 생활, 그리움이 항상 저변에 깔려있었던 나날들. 여동생들이 왜 그렇게 보고 싶었던지요.

어린 시절, 학교에서 빵을 받으면 꼭 먹다 남겨 동생들에게 주기 위해 가방에 넣어두곤 했던 저였습니다. 동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기뻤거든요.

사실, 내 동생들은 참 불쌍한 아이들이었어요.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모로 보내졌던, 어린 나이에 세상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동생들입니다.

바로 밑 여동생은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받은 월급들을 아껴 옷 안쪽 주머니에 실로 꿰매어 집으로 보내곤 했던 친구였어요. 오빠로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마음은 지금 생각해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요.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해보면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파요.

▲ 안광오 명인의 작품 '삼남매'

▲ 안광오 명인의 작품 '평상의자'

송충이는 솔잎을 떠날 수 없다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했고, 슬하에 1남 2녀 아이들도 태어났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나무에 새겨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그 작품들은 지금도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많은 사람에게 선보입니다.

때로는 하는 일이 버거워 쉬운 일을 찾을 때도 있었습니다. 망치질해서 돈 좀 모이면 장사한답시고 빈손 되기를 대여섯 번. 그리고 깨달았지요.

‘나는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는구나. 송충이가 솔잎 떠날 수 없듯이, 목공을 떠날 수 없구나! 그렇다면 이 분야에서 더더욱 깊이 파고들어 보자’ 마음먹으니 더 많은 기술을 배우는 새로운 저로 거듭나더군요.

▲ 안광오 명인이 방송에 출연한 모습

추억이 깃든 목공예의 세계

이제 나는 그 나무들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추억들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제게 나무는 나에게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입니다.

뭉툭한 손끝으로 느껴지는 매끄럽기도 하고, 거칠기도 했던 각기 다른 소재들. 하나하나의 섬세한 질감에서 나는 적합도와 유동성을 알아갔습니다.

촉감이 손끝에 전해질 때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강함. 그것은 나를 움찔하게 만드는 동시에 나의 감정을 오롯이 투영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내가 만든 목공예품들은 그 나무들이 지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의 성장과도 연결되어 있었음 나이가 제법 들어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 안광오 명인의 서각 작품 '심안'

▲ 안광오 명인의 서각 작품 '불심'

▲ 안광오 명인의 서각 작품 '배려'

▲ 안광오 명인의 초대전시회

▲ 안광오 충청명인의 작품 '완자무늬 찻상'

▲ 안광오 충청명인의 작품 '경상'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뽀글이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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