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에게 병법을 알려준 구봉 송익필과 입한재
이순신장군에게 병법을 알려준 구봉 송익필과 입한재
오늘은 조선 중기의 위대한 학자, 송익필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한재의 정문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송익필 선생의 약사 비석입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당시 송익필 선생이 쓴 병풍 글씨를 원본으로 하여 새겨진 것입니다.
2021년 10월, 당진시와 여러 기관이 힘을 모아 이 병풍비를 건립했습니다. 송익필의 자는 운장, 호는 구봉 시호는 문경입니다. 본관은 여산 이며, 1534년 2월 조선 중종 29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송사련, 어머니는 연일정씨이며, 그는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송익필은 현재의 삼청동에서 태어나, 1599년 8월에 6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송익필은 20세부터 이이 와 성혼 등의 인물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통달하게 됩니다. 그는 예학과 문장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과 함께 ‘8문장’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약 500여 수에 이르며, 성혼 등과의 서신 왕래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송익필은 예학의 종사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학통은 김장생으로 이어지고, 다시 김집을 거쳐 송시열에게까지 이릅니다.
그는 7세에 ‘산가모옥월참차’라는 시구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7살에 시를 지은 것이 놀랍습니다.
이외에도 그와 관련된 많은 야사들이 있는데요. 검증하기 쉽지 않은 내용은 생략을 좀 했습니다.
이이가 쓴 ‘천도책’에서는 송익필의 학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도책은 자연현상과 인간의 행동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으며, 이이는 이 책을 통해 1등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이이는 송익필에게 질문을 던지라고 하여, 많은 수험생들이 그를 찾았고 송익필은 즉각적이고 명쾌한 답변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송익필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양한 젊은이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이이도 자신의 조카들을 송익필에게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홍가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송익필을 존중하며 예를 갖추었습니다. 홍가신의 형은 송익필과 만난 후 그의 인품에 감명을 받아 절을 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송익필은 당진에서 입한재를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가 이순신에게 병법을 가르친 일화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입구에는 구봉선생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현판으로 쓰여 있습니다.
율곡 이이가 존경하던 천재 구봉 송익필.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글에서는 통달한 도사처럼 나오기도 합니다. ^^;;
찾아보니 그의 흔적이 담긴 입한재는 그가 머물던 장소로, 공부도 하고 가르친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송익필과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송익필은 조선 중기 위에 언급한 것처럼 '8인의 문장'으로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지혜와 통찰력은 제갈공명과 비교되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받아서인지 벼슬을 하지 못하면서 정사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율곡 이이의 집에서 거주하며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곡은 이순신이 정계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송구봉 선생에게 이순신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송구봉은 서당의 학생들을 이끌고 천엽에서 자연을 관찰하며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이순신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종종 훈련받던 내용보다 잡히는 고기나 놀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꾸중을 받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어느 날 자라 새끼를 발견하고 이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송구봉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미래의 해전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출처-당진 신문)
또한 송익필의 묘는 지역 사회에서 매년 그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제사가 거행되기도 합니다. 기념비에 쓰여있는 내용을 보면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여럿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후손과 제자들은 송익필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제사를 올리고,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뒤편에는 오래된 나무들과 소나무가 즐비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치 송구봉의 아쉬운 뒷모습과 같습니다.
송구봉은 그의 지혜와 지식을 통해 이순신을 돕고,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그는 서출로 태어나 높은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역사 속에서 잊혀갔고,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송구봉의 영향력은 여전히 후대에 살아있습니다.
송익필 선생의 묘소는 그가 남긴 소박한 삶을 기념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익필 선생이 남긴 병법과 학문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들에게 전수되었고, 마치 이 비석은 그가 남긴 유산을 처럼 매우 오래되어 보입니다. 그의 묘라는 것이 비석에 쓰여 있습니다.
묘소의 좌측과 우측에 위치한 조형물입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담담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갈한 묘의 모습은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학문과 영향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송익필은 약 500여 수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들은 그의 문장 실력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묘소에서 내려다보이는 입한재는 송익필 선생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소박하지만 견고한 입한재는 그가 쌓아온 지식과 병법을 후대에 전수하며, 그곳에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송익필의 문집은 《구봉 문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학문적 성과와 다양한 글을 모은 책입니다. 문집에는 시뿐만 아니라 그가 쓴 여러 글과 서신도 포함되어 있기에 다른 주요인물과 왕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송익필은 성혼, 이이 등과의 서신 왕래가 일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서신들은 그의 학문적 교류와 인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입한재를 통해서 송익필의 삶과 학문에 대한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냥 재미로 보기에는 좋을 것 같고요. 새로운 인물에 대해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기에 이곳을 자세하게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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