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값어치

“예리한 칼날 위에 나를 세우는 것”

충남 서천군 서천읍 사곡리 62


<도민리포터의 말>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입니다.

이 글은 충청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 중 서예문인화 최명규 명인의 인터뷰 글입니다. 명인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합니다.

▲ 최명규 서예문인화 충청명인이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처음으로 붓을 들었습니다. 벼루에 먹을 갈 때의 풍겼던 먹내음이라니. 그로부터 40년 동안 서예를 했습니다. 붓에 먹물을 묻혀 뾰족해진 붓끝을 화선지에 대고 써 내려가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잡념이 없어지고 생각이 비워지는 느낌입니다.

서예는 저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내음과 붓끝의 떨림, 그리고 화선지 위에 새겨진 글자들 속에 담긴 제 인생의 흔적입니다. 붓을 잡는 손은 이제 저에게 신체 일부가 아닌, 삶의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입니다.

▲ 서천군청 청사 머릿돌 쓰고 기념사진을 찍은 최명규 명인

형님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다

나는 충남 서천의 한 외딴 마을, 문산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은 약 13㎞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깊은 산골짜기였지요. 그야말로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날 길 없는 지역적 환경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산과 들로 먹거리를 찾아다녔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우리 가족의 삶은 너무도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죠. 그 시절 산을 누비고 다니는 것은 나의 일상이었고, 자연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길가에 자생하는 싱아를 뜯어 먹었나 봅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복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형님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토사물을 쏟아내던 형님의 입에서 싱아 풀잎이 나오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식이 배고픈 나머지 풀을 뜯어 배를 채웠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부모님은 형님을 간호하며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토록 과묵하시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는 걸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평생을 강한 모습만 보여주셨던 우리 아버지였는데 말입니다.

형님의 사건은 가난과 고통의 무게를 느끼게 했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난은 쉽게 뿌리칠 수 없었으며, 그 작은 농토에 7남매를 먹여 살리는 부모님의 헌신은, 크는 우리에겐 검소와 절제를 생생하게 뼈에 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 최명규 충청명인이 출간한 수필집

가난은 ‘고난과 성장’의 토대

나는 가난한 농부의 셋째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귀하게 자라지 못했고, 사랑을 듬뿍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잡초처럼 자랐습니다. 사실, 온전한 야생에서 자란 셈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뿌리 깊은 잡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했나요. 사람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라면, 제 속에는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제법 마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는 육성회비라는 거대한 벽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산골에 무슨 돈이 있어 육성회비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학교에 낼 돈을 내지 못하면 마치 죄인처럼 다루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맞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했던 때였으니까요.

나는 종종 교실에서 쫓겨나 학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곳은 어쩌면 나에게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봄바람이 꽃내음을 실어나르는 향기에 취해 나만의 세상에 잠기기도 했고, 나무의 속삭임이 전해주는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들이 꽤 많았어요.

학교가 파할 때면 그제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들과 같이 귀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교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는 어떤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삶의 궤적이 되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회에 대해 불평등함이 겹쳐져 슬슬 오기가 발동되더군요.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라는 인내심을 기르게 됐습니다. 안 해본 것 없이 깨지고 부딪쳐 고난에서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인내력을 길렀습니다.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은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 최명규 충청명인 작품

꿈과 열정의 결과물

고등학교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주위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모습이 어찌나 부러웠던지요. 친구들의 밝은 표정과는 반대로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내게는 상급학교 진학이란 꿈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아야 했습니다.

대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긍긍하다가 장사를 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고향에서 군 복무를 단기사병으로 제대하고 우체국 집배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공부였습니다. 오랜 꿈이었던 학업에 대한 열망이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주경야독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나의 배움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단련된 인내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맹자가 쓴 고자장구 하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외우고 다니며, 인생 후반전을 기다렸습니다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고천장강대임어시인야)

必先苦其心志(필선고기심지)

勞其筋骨(노기근골)

餓其體膚(아기체부)

空乏其身行拂亂其所爲(궁핍기신행불란기소위)

所以動心忍性(소이동심인성)

曾益其所不能(증익기소불능)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사명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몸을 지치게하고

그 육체와 피부를 굶주리게 하여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그 성질을 인내하게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기 위함이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늦은 시간까지 책을 펼치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내 앞에 놓인 고등학교 문턱은 이제 더는 불가능한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졸업장을 손에 쥐고 대학교에 갈 계단을 오르게 된 기회가 내게 도래했다는 기쁨, 그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설렘이었습니다. 이로써 드디어 나도 대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얻게 된 겁니다.

하지만 박봉에 내 뒷바라지만 하다가 늙어가는 아내에게는 차마 대학에 갈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몇 달을 망설였습니다. 밤에는 대학생, 낮에는 회사원의 이중생활.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서예를 하면서 풀었던 것 같습니다. 서예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내 속에 잠재된 열정을 또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 최명규 충청명인 작품

세계 핵 안보 정상회의에서 휘호를 써 주다

대학을 다니면서 본격적인 서예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아낌없는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여러 공모전에도 응모하여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공무원들만 참여하는 ‘공무원 미술대전’에 참여하란 권유를 받았습니다. 동상도 받고, 우수상도 받아 세종 문화회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상을 수상받았습니다.

그 이후의 제 삶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여러 행사에 초청받아, 특별한 순간들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2년 4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핵 안보 정상회의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청와대의 특별 출장 조치로 외국인들에게 휘호를 써 주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 최명규 충청명인 작품

서예가로서의 ‘다시 시작하는 여정’

꿈이 커졌습니다. 서예와 문인화를 열심히 해서 대한민국 최고의 서예가가 되어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이상 남은 공직을 과감히 그만두고, 제자들 양성과 강사의 길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선택은 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저의 예술을 펼치는 것을 넘어, 후배들에게 서예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서예가로서의 여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말입니다.

제 손끝에서 흐르는 먹물처럼, 제 마음속의 열정도 끊임없이 이어져 서예의 길을 걷고 있는 분들에게 단순한 글씨가 아닌,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철학, 전통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문인화와 서예 수업 중간중간마다 인문학 강의를 해서 선비가 갖추어야 할 겸양과 도리, 그리고 깊은 사고에 관한 강의를 동양 고전 논어 맹자 장자 노자의 주요 부분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 최명규 충청명인 작품

힘들수록 ‘실력을 쌓자’ ‘겸손하자’는 좌우명에 의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다가 한국 예총 서천 지회장으로 추대받아 지역 예술 문화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활동은 집안의 경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내는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수입은 없고 돈만 쓰고 다니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가도 ‘예술 문화로 돈 버는 놈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기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전문 예술인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인데, 어디 그걸 원망하고 살아봐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번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인정받지 못하는 주변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실력을 쌓아 나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좌우명으로 생활했습니다.

‘대한민국 명인’의 반열에 올라서다

그런 어려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예총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명인에 신청하고, 네 번의 심사를 거치는 복잡한 관문을 통과하여 명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참으로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 당시 생각했던 명인에 오르고 나서의 감회는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냐고요? 명인에 오르고 나도 인생의 역전이라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부푼 기대는 허물어졌습니다. 명인 이전의 생활이나 지위 등 피부에 와 닿는 일이 전혀 없는 명인의 삶이지요.

그러나 나는 ‘명인’이라는 타이틀은 사랑하지 않지만 ‘명인 최명규’라는 사람만은 진정 사랑합니다.

나는 명인이기에 쉬지 않고 작품을 해야 하고, 그에 걸맞은 문화와 예술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쉬지 않고 채찍질하고, 위로하고, 독려합니다.

한발 한발 더 나은 위치에 오르려 하고, 주변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명인이라는 제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양심 있고 철학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사고입니다.

공자가 일찍이 말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이에 해당하는 생활 철학이라 했습니다. 나의 삶은 험난한 가시밭길 그 자체였던 만큼, 앞으로도 몸의 편안함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인에 대우 있음을 생각지 않고, 나의 족적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시상받는 모습

조고각하(照顧脚下)

조고 각하란 말은 불교 용어인데 저 먼 곳 즉, 이상이나 이념에 빠지지 말고 자신이 가는 길에 충실하라, 발 밑을 보란 뜻입니다. 오로지 내 앞길을 밝히라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나의 좌우명으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2021년 문화원장의 권유를 받고 문화원장에 출마하여 2021년 12월 20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해 2월 4일에 서천문화원장에 취임했습니다.

문화원에 출근하는 첫날, 문화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각오했습니다. 군림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군민을 섬기는 문화원장, 직원들의 아버지 같은 원장으로 근무할 것을 말입니다. 문화원장 역시 봉사직으로 수입은 없지만 보람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이를 생각하며 자신을 예리한 칼날 위에 세울 것입니다.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뽀글이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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