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여든 상주의 동학교당
안녕하세요
상주시 SNS 서포터즈
최홍대입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의 과거에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通信使)를 양국이
근대적인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수신사(修信使)를 두 번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은 격변의 시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시기에 민초들의 운동의
분위기는 무르익게 됩니다.
지금은 누구나 없으면 살 수 없는
에너지원인 전기를 처음 본
조선관리들은 그걸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서양이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여전히 신분제에 갇혀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기만 했던 것입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동학운동의 흔적들은
대부분 집강소나 그 운동이 있던
장소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데
경북 상주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상주동학교당이 마치 한옥마을처럼 남아 있습니다.
상주동학교당은 김주희 선생이
1904년 동학계 경천교(敬天敎)를 창립한 후
상주 지방을 본거지로 정하고
부흥과 포교를 위해 1915년
지금의 자리에 교당을 건축한 곳입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제약 없이
미국이나 유럽의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유학을 떠나서 배우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바뀌고 있을 19세기에는
그런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근대화시기에 일본과 조선의 태도는
정반대였는데 이는 민족성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온 모든 앞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한 나라였습니다.
반면 조선은 오래된 전통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변화가 더뎠습니다.
백성들은 접하지도 못했던 서양의 학문이라는
서학에 대항하여 동양의 학문을 지향하는
동학으로 일어섰으며 백성들이 근본이 되며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을 내세웠습니다.
가장 민족적이면서 서양의 종교와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상주동학교당이 건립될 당시에는
모든 가옥이 초가지붕이었으나
후에 천연 석재로 지붕을 바꾸었다가
1987년에는 서재만을 원형인
초가지붕으로 개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혹세무민의 죄로 탄압을 하자,
이에 대항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워 전봉준이 주도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동학과 관련된
건물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유물은 총 177종 1,084점으로 전적, 판목, 복식 등이며
경상북도 민속자료가 이곳에 있습니다.
상주동학교도로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1922년 5월 경북 상주에 김주희를 교주로 하는
동학교가 설립될 때 김낙세는 부교주를 맡았는데
고문으로 옥사를 당했습니다.
상주라는 도시를 자주 방문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가옥이 있던 곳은
처음 방문해 보았습니다.
넉넉한 공간에 조성되어 있는 가옥들이
당시 상주의 동학교당의 교세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항상 진보에 의한 변화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을 때
터지게 됩니다.
조선 말기에 세계의
변화를 외면했던 조선조정과
탐관오리의 수탈, 일본의 침략야욕 노골화 등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농민들이 봉기해
폐정개혁안 실시를 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길은 어디로든지 열려 있지만
잘 만들어진 길과 아직 개척하지 못한 길에는
걷는 속도가 다릅니다.
동학이라는 것은 걷지 않았던 길을
걸어보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시작부터 힘의 차이와 기회가
부족했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의
민초들이 피워보려고 했던
녹두꽃을 만나볼 수가 있는 공간입니다.
【상주동학교당】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1길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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