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 끝에 명중한 ‘퍼펙트 골드’‘양궁 신화’ 김경욱을 만나다 [2024년_12월호]
인고 끝에 명중한 ‘퍼펙트 골드’
‘양궁 신화’ 김경욱을 만나다
지금은 자주 쓰이는 양궁 용어 ‘퍼펙트 골드’의 시초를 아시는지. 바로 여주가 낳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경욱의 화살에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정중앙의 카메라를 정확히 찌른 금빛 화살로 전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퍼펙트 골드’의 주인공을 여주에서 다시 만났다.
글. 두정아 사진. 이대원
여주에서 키운 양궁 금메달의 꿈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강천변이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어요. 아침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올라오기도 했지요. 이 강을 따라 걸으며 국가대표의 꿈을 다짐하곤 했습니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강천보 한강문화관 전망대에서 김경욱 전 양궁 국가대표 선수는 옛 생각에 잠긴 듯 강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고향에 오면 매일 강천변을 걷는다고 했다.
김 전 선수는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카메라 브레이커’, ‘퍼펙트 골드’ 등 다양하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개인·단체 금메달 2관왕을 거머쥐었던 그는 당시 과녁 정중앙에 설치한 카메라 렌즈를 두 번이나 정확히 맞추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예측 불가한 스포츠의 묘미를 여실하게 보여준 순간이자, 양궁 열풍에 뜨거운 불을 지핀 순간이었다. 이 영광의 순간에는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다.
“사실 첫 화살은 잘못된 계산이었어요. 선수와 관계자들은 화살이 날아가는 순간 다 알아요. 속으로 ‘엇, 이게 아닌데’ 싶었죠. 그런데 정중앙을 맞힌 겁니다. ‘오늘은 되는 날이다’ 외쳤죠.”
하늘이 도운 첫 번째 명중에 힘입어 자신감을 얻은 그는 또다시 카메라 렌즈를 정확히 맞혔다. 두 번째는 철저히 계산된 그의 실력이었다. 이때 ‘퍼펙트 골드’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1970년 여주에서 태어난 김 전 선수는 여흥초등학교 시절 양궁에 입문, 여주여자고등학교 시절 국가대표로 선발되며 단숨에 유망주로 떠올랐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 붐이 일어나던 때였어요. 학교마다 한 종목씩 선수 양성을 했는데 여흥초등학교가 양궁을 담당하게 된 거죠.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는 비포장도로였고 버스를 타고도 한참 걸어야 했어요. 부모님께서는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싶으셨다고 해요. 그 시절에는 방과 후에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던 것 같아요.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빠짐없이 훈련에 임했지요.”
강인한 정신력이 담긴 금빛 화살
빛나는 기록을 세우기까지, 늘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신 뼈아픈 경험이 있다. 특히 서울 올림픽 국내 예선전에서 10점 만점을 기록한 화살을 심판이 확인하기 전에 뽑아 0점 처리된 바 있다. 긴장하지 않기 위해 연습 때처럼 하려던 것이 실수로 이어진 것이었다. 26살이었던 1996년의 올림픽 출전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 나와 있는 마음이었어요. 상대방을 쓰러뜨려야만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불안감이 어쩌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양궁은 멘탈 싸움이에요. 그리고 멘탈의 가장 기본 요소는 인성입니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성공해요. 강력한 멘탈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이 부분은 해외에서 벤치마킹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지요.”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전국대회에서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유망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제가 인복이 참 많았다”라며 “많은 분이 계속 관심 있게 저를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늦게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중에서도 여주여자고등학교 시절 양궁팀 감독이었던 고(故) 이용진 씨는 친정아버지와 다름없는 스승이었다고 한다. 김 전 선수는 몇 달 전 유명을 달리한 스승을 기리기 위해 최근 유족을 만나 위로를 전하며 깊은 가르침을 되새겼다.
2028년 LA 올림픽을 기다리며
김 전 선수가 공식적으로 고향을 방문한 것은 10년 만이다. 그는 10월 전국체전을 참관하고 양궁 후배들을 격려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특히 지난해 여주를 빛낸 김 전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신진동의 생가 근처에 건립된 조형물은 남다른 의미를 더한다. 그는 “여주에서 이렇게 따뜻하게 환대해주시고 멋진 상징물을 설치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여주에는 김 전 선수의 모교인 여흥초등학교를 비롯해 여주여자중학교, 여강고등학교 양궁부가 활동 중이다. 특히 여주시청에서 운영 중인 직장운동경기부 여자양궁부는 경기도 내 유일한 여자양궁부로, 최근 전국 남녀양궁 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여주시청 선수들을 만난 김 전 선수는 “긴장감과 부담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며 후배들의 마음을 먼저 살폈다.
“양궁은 기초만 6년여가량 닦아요. 양궁을 보통 대나무에 비교하죠. 대나무는 뿌리를 내리는 데만 한 6년이 걸린다고 하거든요. 뿌리 내리고 난 다음부터 이제 쭉쭉 자라나는 겁니다. 물론 기초를 잘 닦았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어요. 다만, 막연히 불안해하기보다는 움직이면서 또는 연습하면서 불안감을 떨쳐버리기를 바란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었어요.”
지난 1997년 빙상 국가대표 출신 이인훈 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김 전 선수는 2015년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남편과 함께 양궁 클럽을 운영 중이다. 슬하에는 2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는 아이들 곁에 있어 줄 시간이 많이 부족했는데, 미국에 거주하면서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며 “25살인 큰 아이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틈틈이 양궁 클럽의 일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2028년에는 김 전 선수의 거주지이기도 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 파리 올림픽에서 단체전 10연패라는 신화를 달성한 여자 양궁은 11연패 기록에 도전하게 된다. 위기 속에서 기적을 일군 김 전 선수의 빛나는 기록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양궁의 찬란한 역사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10연패이다보니 더 관심을 가져 주시고, 기대감 또한 커지는 것 같아요. 협회나 선수들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지만, 철저히 준비하여 잘 해낼 겁니다. 저는 직접 경기장을 찾게 될 것 같아요. 그때 되면 아마 TV 방송을 통해 인사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양궁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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