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살아요_설국이었다
설국이었다
편안할 영(寧)과 넘을 월(越)
겨울이다. 아직 다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위로 소복하니 눈이 쌓였다. 날이 조금 쌀쌀해졌다 싶었지만 벌써 이렇게 폭설이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부랴부랴 창고에 넣어두었던 제설 장비들을 꺼내와서 진입로의 눈을 치웠다. 물론 작년에 SNS에 올린 사진과 영상을 보면 분명 이맘때쯤에도 한 차례 눈이 왔었다. 11월 말에 발목까지 쌓인 눈을 찍은 영상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뭔가 예전에 비해 더 빨리 눈이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직 겨울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라면 가을 날씨 답지 않게 몇 날이 포근해서 그랬던 걸까. 폭설은 그야말로 기습처럼 쌓였고, 부랴부랴 눈을 치우면서도 왜? 벌써? 이렇게나 많이?라는 생각을 했다.
산 중턱에 살고 있어서 가장 슬픈 점 중 하나는 제설차가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제설차뿐만 아니라 택배차도 올라오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직접 치우지 않는 한 아무도 이 눈을 치워주지 않기 때문에 쌓이는 모든 눈이 나의 몫이라는 말이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은 이미 아침햇살을 받아 아래쪽부터 천천히 녹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반쯤 녹아서 슬러시가 상태의 눈은 치우기에 품이 더 든다. 200미터가 안 되는 거리의 눈을 치우는데 꼬박 2시간이 걸렸고,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내리느라 숨이 턱까지 막힌 나는 벌써 하루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린 채 방전되고 말았다. 제설 장비를 내려놓고 헥헥 거리며 “괜히 로제가 ‘아파트, 아파트’를 외치는 게 아니군. 역시 사람은 아파트에 살아야 해.”라는 생각을 하며 지난날 산으로 들어와 살고자 했던 과거의 나를 탓하기를 한참,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난 뒤에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설국. 그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처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의 설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제설의 긴 노동을 끝마치자, 설국이었다.’
물론 우리 동네에만 눈이 내린 것도 아니고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렸던 터라 다들 눈에 대한 감흥이 줄어든 것 같지만, 적어도 겨울의 옷으로 갈아입은 골짜기는 몇 해를 걸쳐서 봐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그야말로 수묵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절경. 그림 같은 풍경에 나는 또 미련하게, “역시 산에 올라와 살길 잘했어!”라며 직전에 했던 아파트 타령을 집어넣었고 산에 들어오길 결정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했다. 폭설로 인한 피해가 곳곳에서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고, 눈이 그저 보기에만 아름답게 남아있기를 기도했다. 산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눈에 의한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할 뿐.
겨울이 왔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완연한 겨울. 가을을 미처 보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큰 겨울이 왔으니,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좋아, 이번에 산 아래로 내려가 장을 봐올 때면 눈삽과 넉가래를 새로 하나 장만해야지. 겨울을 빌미로 새 장갑과 양말도 하나씩 사다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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