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 박세화를 봉안한 사당 '충용사'

음성에 있는 충용사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충용사는 첫방문으로 음성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충용사는 의당 박세화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박세화는 한일한방의 비보에 접하고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순국열사입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 되었고, 충용사에는 회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명와 정규해를 추배하고 있습니다.

1964년 당시의 음성군수 유용기가 지방유림들의 협조를 얻어 사우를 건립하였습니다. 사우는 정면 4간, 측면 1칸 반의 맛배지붕으로 충용사라 현액하였고, 솟을삼문이 있는데 광제문이라 하였으며 토석혼축의 담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충용사 담장 옆에는 의당 박세화 순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1834~1910년) 선생은 월악산 용하동에서 병산영당을 창건하고 제천에서 20여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인을 지도했습니다.

선생은 1905년 춘추대의(春秋大義) 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8개월간 서울의 한국주차군사령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글 읽은 선비로 책임을 통감한다"며 23일간의 절식(絶食) 끝에 순도(殉道)·순국(殉國)하신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한말의 대 유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단식 중지를 종용코자 찾아온 일제 헌병의 말 장화를 곰방대로 내리치며 당장 물러가라고 호통친 일화는 지금까지 구담(口談)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당 선생의 순국은 봉건적인 충(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아는 자', 즉 '선비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합니다.

충용사에 방문했을 때는 전날에 내린 하얀 눈으로 사당의 모습이 더해졌습니다. 눈이 녹아내린 길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역사적인 의당 박세화를 위한 사당 충용사를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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