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시간 전
[기회기자단] 펜으로 싸우고 행동한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
[변윤서 기자]
독립운동가 안재홍, 조국을 위한 글과 행동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
많은 애국지사가 독립을 위해 일어섰다.
그중에서도 언론과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역사학자인 안재홍(호: 민세) 선생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수립을 위해 헌신했다.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 젊은 지식인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안재홍 선생은
한문을 공부하며 ‘조선의 사마천’이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서양 학문도 익히며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와세다대학교에 다니던 중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해혁명의 열기를 직접 경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중앙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치다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를 떠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해
해외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며 활동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언론으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그는 1920년대부터는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역임하며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1926년에는 영호남 일대를 답사하며
14일간의 여정을 기록했고,
임진왜란 사적지를 돌아보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그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했다. 충무공 이순신과
다산 정약용을 재조명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9차례 투옥되며
7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민족 통합을 위해 힘쓰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신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좌우 이념을 넘어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자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별세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아들과 동생이 희생된 사실을
모른 채,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나라의 통합을 염원하는 유언을 남겼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잇다
안재홍 선생은 언론과 역사 연구, 외교 활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지식인이었다. 감옥에서도,
글을 통해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가 강조했던 ‘다사리’ 정신은
‘다 함께 말하고, 다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재홍 선생이 꿈꿨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1989년,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고택을 지키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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