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전
[부산시보]부산을 걷다-욜로갈맷길 ② 오륙도 품은 이기대
길은 포용이다. 길을 걸으며 나를 누그러뜨리고 너를 받아들인다. 조금 더 참지 못한 나를 나무라고 그럴 수밖에 없던 너를 이해한다. 걸으면 걸을수록 나는 너에게 다가간다. 다가가고 다가가 이이일(二而一)이 된다. 둘이 하나가 된다.
‘오륙도 품은 이기대’ 욜로갈맷길은 포용의 길이다. 동해는 남해에 스며들고 남해는 동해에 스며들어 두 바다가 하나 되는 이이일의 길이다. 동해는 탁 트인 바다, 남해는 아기자기 다도해. 부산 사람의 화통하면서 다정다감한 기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길이다.
욜로갈맷길 5코스 - ‘오륙도 품은 이기대’ (4.5㎞ 1시간 30분)
①이기대 동생말 ②이기대 어울마당 ③농바위전망대 ④오륙도해맞이공원 ⑤오륙도선착장
"부산은 고마운 곳. 졸지에 오갈 데 없어진 6·25 피란민을 품어준 곳이며 그들이 재기하도록 기꺼이 디딤돌이 돼준 곳이다. 외지인은 부산역이나 김해공항에 도착하면 잠시나마 부산을 향해 목례해야 한다. 그게 피란수도 부산에 대한 예의다. "
부산 욜로갈맷길은 역사를 품은 길이기도 하다. 특히, 부산의 바다를 따라서 이어지는 제5코스 이기대∼오륙도 구간과 제6코스 오륙도∼영도 흰여울마을 구간은 부산 그 자체다. 바다와 함께한 부산역사의 밀물 썰물을 보여주는 길이며 부산이 어째서 해양수도인지 보여주는 길이다.
시작도 바다, 끝도 바다
제5코스를 걷는다. 시작도 바다고 끝도 바다다. 바다에 푹 빠졌다가 빠져나오면 누구라도 혼이 빠진다. 부산의 길은 그렇다. 빠지게 되면 혼이 다 빠져서야 빠져나온다, 누구라도. 그런 길의 하나가 일망무제 수평선과 나란히 이어지며 바다에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욜로갈맷길 5코스다.
시작은 이기대 동생말이다. 어떻게 갈까. 도시철도와 버스를 번갈아 타면 된다. 도시철도 2호선 경성대·부경대역 5번 출구로 나와서 버스 환승 후 섶자리·동생말 가까운 데서 내릴 것. 해초의 하나인 잘피가 ‘풀섶’을 이뤄서 섶자리다. 동생말은 중의적이다. 동쪽으로 뻗은 곶, 또는 동(銅)을 생산하는 곶이다.
곶(串)은 꼬챙이다. 우리말로 ‘말’이다. 해남 토말, 기장 광계말처럼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을 이른다. 울산 간절곶도 그런 예다. 포항 장기갑처럼 갑(岬)이라고도 한다. ‘동(銅)을 생산’은 무슨 뜻일까. 일제강점기 구리광산이 이기대에 있었다.
분포. 이기대에서 섶자리·동생말 가는 길에 있는 초·중·고 교명이다. 분포를 한자로 쓰면 동이 분(盆), 개 포(浦)다. ‘개’는 고어인가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지금도 널리 쓰는 순우리말이다. 개펄, 갯가, 갯바위 등등. 여기 토박이들은 분포보다 분개를 즐겨 쓴다. 경상도식으로 세게 발음해 “분깨, 분깨” 그런다.
분포는 포구다. 지금도 바다고 포구지만 옛날에도 바다고 포구였다. 특산물은 소금이었다. 햇볕에 쨍쨍 말리는 천일염이 아니라 장작불에 활활 태우는 자염(煮鹽)이었다. 자염은 조선 전래의 소금. 질그릇 동이에 바닷물 한가득 채우고 장작 지펴서 소금을 얻었다. 그게 지명이 되고 교명이 됐다.
이기대 지명 유래는 당차다. 한자로 쓰면 ‘二妓臺’. 두 기생의 묘소가 있었다. 두 기생은 임진왜란 때 적장을 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부산의 논개였다. 이기대 별칭이 의기대(義妓臺)다. ‘二妓臺’ 세 글자를 새긴 각석은 꼭 봤으면 한다. 구름다리를 지나서, 해녀 막사를 지나서, 구리광산을 지나서, 최계락 시비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널따란 갯바위 석벽에 새긴 세 글자가 보인다.
치마바위·농바위·밭골새…정감 넘치는 지명들
수평선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공존과 상생의 전형이라서 봐도 봐도 눈이 간다. 하늘은 아무리 높아도 수평선을 더 아래로 짓누르지 않으며 수평선은 하늘이 아무리 누른들 주눅들지 않고서 자기의 선을 지킨다. 하늘은 높되 높지만은 않으며 수평선은 낮되 낮지만은 않다. 하늘은 하늘의 자리에서, 수평선은 수평선의 자리에서 공존하며 상생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서 뒤를 본다.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중간 지점에 설 때도 있었겠지만 대개는 걸어온 길이 짧고 걸어갈 길이 길거나 그 반대였다. 지금 걷는 이기대 길이라고 다르랴. 오늘은 이 길 딱 중간에 나를 세우리라. 앞과 뒤가 같거나 엇비슷한 중간이 되리라.
참 어렵다. 중간을 한다는 것. 중간을 맞춘다는 것. 오늘도 그렇다. 맞춘다고 맞췄는데도 한쪽이 길고 다른 쪽이 짧다. 가파른 나무계단이 막 끝난 갈림길. 갈림길 이정표는 걸어온 길이 길다고 한다. 걸어온 길은 동생말 전망대에서 시작해 해녀 막사, 구리광산, 어울마당. 걸어갈 길은 치마바위, 농바위, 낭끝, 밭골새를 거쳐 오륙도공원에서 일단락된다.
우리말 지명은 언제 들어도 정감이 넘친다. 정감이 넘칠뿐더러 듣는 순간 감이 팍 온다. 100% 맞는지는 몰라도 치마바위는 치마를 펼친 듯한 바위, 농바위는 장롱처럼 생긴 바위, 밭골새는 밭고랑 사잇길, 낭끝은 벼랑 끝.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손때가 묻고 말투가 밴 토박이 토속어다. 지명 하나하나 진국이다.
되도록 빠르게 가야 할 길
되도록 느리게 가야 할 길
길은 빨리 걷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인생길이 그렇듯 어떤 길은 되도록 빠르게 가야 하고 어떤 길은 되도록 느리게 가야 한다. 오륙도를 품은 이기대 길은 되도록 느리게 가야 할 길이다. 4.5㎞ 100분. 두 시간 안 되는 거리라서 반걸음씩, 반의 반걸음씩 아껴 가며 걸어야 한다. 어차피 한 생애를 걸어도 다 걷지 못한다. 이 해안, 이 해풍, 이 해조음. 이것들이 어찌 한 생애에 이뤄진 일이랴. 한 생애에 그칠 일이랴.
드디어 오륙도. 오륙도는 국가가 지정한 명승지다. 지자체마다 8대니 10대니 명승지를 내세워도 국가 명승지는 그 모두를 뛰어넘는다. 보이는 것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오륙도 다섯 섬, 여섯 섬은 하늘이 직접 내린 명승. 구구절절 밝히는 게 구차하다. 섬 말고 명물을 두엇 꼽으라면 등대와 해상전망대다. 1937년 첫 점등해 등대지기가 상주하던 오륙도등대는 2019년 무인등대로 바뀌어서도 여전히 희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는 부산의 해상전망대 중에서 가장 높다. 언제 가봐도 아찔하다.
오륙도등대는 왜 흴까. 유인(有人) 등대는 가급적 육지에서 먼 섬에 둔다. 동해 독도가 그렇고 남해 마라도가 그렇고 서해 격렬비열도가 그렇다. 흰색은 멀리서도 보이는 색.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배가 쉽게 식별하도록 등대도 희다. 국제 규정이라서 세계 모든 유인 등대가 희다. 먼바다 배가 처음 인지한다고 초인(初認)등대라고도 불린다. 육지에서 나는 흙 내음 물씬 맡아지는 등대가 초인등대고 오륙도등대다.
동해 남해 만나는 교류의 바다
명물은 또 있다. ‘오륙도! 동해와 남해 분기점’ 동판(銅版)이다. 여기서 해파랑길이 시작한다. 해파랑길은 오륙도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에서 끝난다. 동판 양쪽엔 ‘동해·남해’ 한글과 영문 글자가 보이고 그사이에 오륙도 섬을 볼록하게 주조했다. 동해의 바닷물과 남해의 바닷물이 합류하는 오륙도 바다는 교류의 바다며 포용의 바다다.
동해와 남해의 경계가 어딘지는 설이 분분하다. 그렇긴 해도 오륙도에 와선 오륙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터. 욜로갈맷길 제5코스는 탁 트인 동해와 다도해 남해가 서로서로 스며드는 포용의 바다를 따라서 이어지는 길이며 부산 사람 화통하면서 다정다감한 기질이 윤슬처럼 반짝이는 길이다. 욜로갈맷길에선 보이는 하나하나, 발길 닿는 하나하나 명승이다. 하늘이 직접 내린 명승이다.
글·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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