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독서 트렌드는 '쓰기'? 필사하기 좋은 노벨 문학상 작품 추천부터 유행 총정리!
필사 노트, 필사스타그램, 필사 챌린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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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筆寫)는 깊은 독서다. 일찍이 시인 윤동주는 시인 백석의 시집을 필사하며 작법을 단련했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라는 말이 있듯 필사는 집중력을 키우고, 글쓰기를 대리 경험하게 한다. 필사하다 보면 어떤 시는 암송하게 되고, 소설 속 멋진 문장은 내 것이 되기도 한다. 컴퓨터 키보드로 베껴 써도 무방하지만, 보통은 연필이나 만년필 같은 필기구로 써야 제맛이다. 아날로그의 장점 때문이다.
손으로 쓰는 속도가 키보드 입력보다 느린 만큼 쓰는 문장을 더욱 많이 느끼고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디지털 시대, 역설적으로 종이에 글귀를 베껴 쓰는 필사가 유행하고 있다. 필사 방법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SNS에는 필사 인증 게시물이 눈에 띈다. 11월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필사 관련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약 70만 건이다. ‘필사노트’, ‘필사스타그램’, ‘필사챌린지’ 등 관련 해시태그를 달고 필사한 문구를 사진 찍어 인증하는 게시물이 확산되고 있다.
독서에 색다른 깊이와 체험을 더해 주는 ‘쓰기’ 체험
지난 3월 출간된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6개월 연속 선정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가수 설현이 필사를 취미로 소개하기도 했다. 나이 든 어르신은 물론, 젊은 층도 필사에 흠뻑 빠져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김은주 씨는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마포구의 한 필사 모임에 나간다.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필사 노트를 꺼내 지난 한 달 동안 필사한 글귀를 읽는다. 한 사람씩 읽은 책과 필사한 문구를 소개하고, 본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야기한다. 지난 4월 시작된 이 모임을 통해 김은주 씨는 인문학적 소양이 넓어지고, 더불어 정신적 성장을 했다고 느낀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추천 콘텐츠를 일부러 피하는 편이에요. 볼 때는 빠져들지만, 보고 나면 영혼이 도둑맞은 기분이 들거든요. 알고리즘, 도파민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다 필사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집중력 향상과 내적 치유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참여 이유도 저마다 다양하다. 더 깊은 독서를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서, 혹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삶의 원동력을 얻고 싶어서 모임에 들어온 이가 많다. 정갈한 글씨로 필사하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도 한다. “책을 읽고 나면 책장을 덮는 독서에서 벗어나 옮겨 적으면서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는 생각에 필사 모임에 들어왔어요. 필사하는 책이 점점 두꺼워져 지금은 에릭 와이너의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라는 책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책을 옮겨 적다 보면 내가 왜 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더라고요.”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직장인 박주승 씨는 말한다. 그에게 필사 모임에서 얻는 활력은 굉장한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필사 인구 3년 동안 5배 늘고, ‘북세권’ 찾는 사람도 늘어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서점가를 중심으로 독서 열풍이 불면서 필사 열풍으로 옮겨갔다. 문화 콘텐츠 플랫폼 예스24의 집계에 따르면 노벨 문학상이 발표된 이후 최단 기간 밀리언셀러를 돌파한 한강 작가의 도서는 물론이고 국내 도서 전체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귀자 작가의 <모순>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21.1%나 판매가 급증했고, 2024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한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은 전년 동기 대비 117배 판매가 증가하기도 했다.
독서 열풍을 타고 소수의 특별한 취미였던 필사는 점점 대중적 취미로 확산하고 있다. 한정판 필사 노트를 함께 증정하는 인문학 책이나 ‘어휘력’, ‘문해력’ 등을 키워드로 한 도서 출간도 급증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제목이나 부제에 ‘문해력’ 또는 ‘어휘력’이 포함된 국내 도서는 출간일을 기준으로 2020년 36종에서 2021년 78종, 2022년 147종, 2023년 162종으로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역시 상반기에만 105종이 출간됐고, 최근 한 달 동안에도 20여 종의 관련 도서가 새롭게 선보였다. 실제 SNS에는 독서 관련 해시태그가 눈에 띄게 늘고, 독서 스터디나 필사 모임 등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모임도 온라인에서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종이책의 내용을 손으로 옮긴 ‘필사’를 검색하면 약 70만 개의 게시물이 뜬다. 도서관, 북 카페, 서점 등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내에 있는 ‘북세권’도 주목받고 있다. 더 예쁜 글씨로 필사하기 위해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는 사람도 늘었다. 종로구 인사동에서 캘리그래피 체험 공간 ‘담묵 수묵캘리그라피’를 운영하고 있는 최남길 작가는 최근에 20~30대도 많이 찾고 있다고 말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등 좋아하는 글귀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시를 나만의 작품으로 만들어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걸 SNS로 공유할 수도 있거든요.” 20~30대 청년층이 최근 종이책을 소비하는 이유가 독서 자체보다는 SNS에서 뽐내기 위한 과시의 성격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과시 문화도 독서 습관을 형성하는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지은 서울도서관장은 “젊은 사람들이 책을 접하는 목적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글쓰기 연습, 완독, 집중과 힐링을 위한 필사
문해력 향상 외에도 필사는 장점이 많은 취미다.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종이와 필기구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어 진입 장벽도 낮다.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으면서도 할 수 있다. 최근엔 필사하기 좋은 문구 모음집이나 하루 한 장씩 사용하는 필사 노트도 출시되고 있다. 필사하기 좋은 고전이나 인문학 문구가 왼편에, 빈 노트가 오른편에 있어 누구나 쉽게 필사할 수 있다. 얼마 전 필사를 위해 서점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시>를 구입한 대학생 이유경 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를 필사하는 맛이 쏠쏠하다고 말한다.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이상의 시는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적도 있고 잘 아는 시들이라 필사를 하면서 외우게 되는 부분도 꽤 있어 더 재미있어요.”
유튜브 채널 ‘미료의 독서노트’를 통해 필사 모임을 이끌고 있는 조미정 작가는 “복잡하고 헷갈리는 소설이라도 잘 정리하며 읽으면 완독이 쉬워진다”라고 말한다. 필사도 ‘여럿이 함께하면 멀리 갈 수 있다’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뒤늦게 책의 매력에 빠져 좋은 책을 공유하고 전달하고 알려주기 위해 2019년 ‘서사, 당신의 서재’라는 북 카페를 창업하고 책 추천 플랫폼 ‘에픽어스’를 연 주식회사 서사의 정도성 대표는 “감각적인 공간에서 책을 읽고 좋아하는 책을 따라 쓰다 보면 책이 가지고 있는 물성을 기반으로 책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접할 수 있다”라고 조언한다.
가끔 다른 이의 글을 써 내려가며 마음을 보듬는 시간을 갖는다는 이민희 공동 대표는 필사를 통해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며 이같이 추천한다. “많은 분이 예쁘게 글씨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필사를 어려워하곤 해요. 필사의 본질은 글씨가 아니라 문장을 옮기며 의미를 깊이 새기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문장을 찾고 글을 옮기는 여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면 필사를 하는 시간이 훨씬 즐거워질 거예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새 시대를 본 사람이 너무나 많다.” ‘느림’의 여유를 찾고,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것은 풀꽃만이 아니다. 필사도 그렇다.
필사하기 좋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 |
<작별하지 않는다> 2024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최신작.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다. <샤이닝> 2023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가 데뷔 40주년에 펴낸 작품.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운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단순한 열정> 2022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작품. ‘칼같은 글쓰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만큼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예리하게 다룬다. |
“필사나 캘리그래피 같은 손 글씨 쓰기에는 감성적인 떨림,
그러니까 디지털 작업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아날로그의 미학이 있어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죠.
뜻을 음미하며 글자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다친 마음을 치유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기도 하지요.”
- 최남길
“필사는 책을 읽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필사는 다양한 글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 소통하며 상호작용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명상을 하듯 필사를 하기도 해요. 저희도 명상용 필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5분이든 10분이든 집중해서 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 정도성 & 이민희
글 임지영 사진 김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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