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시간 전
독립을 위해 평생을 힘쓴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
독립운동가, 교육가, 정치가로 활동을 하신
신익희 선생은 1892년 7월 11일
당시 경기도 광주유수부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났고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외무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고
광복 후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학장,
국회의장 등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사마루)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위치해 있는데요!
서하리 마을 입구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이 앞을 지나는 도로를
해공로(海公路)라고 합니다~
해공로는 1905년 해공 신익희 선생이 열두 살 되던 해,
서하리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는
남한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 길을 따라 매일 학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신학문을 습득하게 된 유서 깊은 길이라고 해요.
생가 입구 골목의 어록 담장에는
"민중의 횃불, 신익희 선생",
"사마루 지는 노을에 해공 선생을 만나다" 등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담긴 글귀들과
신익희 선생의 일대기에 관한 어록들이 이어져 있어요.
1992년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된 생가는
원래 지금보다 동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을축년(1922) 장마에 파손된 것을 옮겨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6.25 전쟁 때 사랑채가 폭격 받아 파손된 것을
개축하였고 1994년에 안채를 보수했다고 하는데요.
생가는 한옥 기와집으로 ㄱ자형 안채와
L자형 사랑채가 울타리 안에 있고
안마당, 바깥마당이 있습니다.
특히, 만앙정(萬仰亭)이라 적힌 현판이 있는데,
'만인을 믿고 따르며 우러른다(존경한다)'는 뜻으로
현판은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이 썼다고 합니다~!✍🏻
또, 광동강숙(廣東講塾)이라 하여
신익희 선생이 일본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여
두 형과 함께 1913년에 개설한 사설 강습소는
일제강점기 후 '동명강습소'라 불렸으며
이웃 마을에서 80명 학생들이 모였다고 해요.
안채 뒤로는 우물, 장독대, 굴뚝,
뒷마당, 툇마루 등이 있던 가옥의 구조로 보아
그 시절 농촌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고
나무 땔감으로 난방을 하고, 음식을 조리하며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을
그 시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안채에서 뒤뜰로 나가면 일각문이 있는데요.
일각문은 뒤뜰로 통하는 문으로
신익희 선생 및 일가의 어록과 유훈이
기록된 기념비가 있습니다.
한낮 볕이 잘 들어서 그런지
기념비에 기록된 어록과
유훈들의 글귀가 더 돋보였어요☀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가면
해공 신익희 선생 가옥이 있는데요.
(종로구 효자동 164~2호)
2005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가옥은
신익희 선생이 사망하기 전까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신익희 선생의 가옥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가 서 있어요🌳
가옥을 관리하는 분이 방문객에게
선생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해 주고 있었어요.
관리인의 설명 중 신익희 선생께서는
검소하게 지냈다고 하는데,
가옥의 구조를 보아도 단박에 지레짐작이 되었습니다😊
봄볕이 가득한 날,
가족, 친구, 이웃들과 손에 손을 잡고
서하리(사마루) 마을의 농촌 풍경도 즐겨볼 겸,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도 꼭 둘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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