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시간 전
[블로그 기자] 울산 남구 울산박물관이 들려주는 울산 이야기
안녕하세요, 제8기 울산 남구 블로그 기자단 오준서입니다.
오늘은 우리 울산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고 울산의 기원, 울산의 역사, 울산의 현재, 울산의 미래를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울산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울산박물관 관람안내 버스 정보
✅ 위치
울산광역시 남구 두왕로 277(신정동, 1888)
✅ 관람료
상설전시실 무료 관람(특별전시실 제외)
✅ 관람시간
09:00~18:00(임장은 17시까지)
✅ 휴관일
1월 1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다음날)
✅ 전화번호
052-222-8501
ℹ️ 울산박물관 울산대공원동문앞(신일중학교앞 방면, 31301)
🚍 225, 415, 472, 513, 518, 533, 725, 735, 753, 754, 1452, 1715번
ℹ️ 울산박물관 울산대공원동문앞(공업탑 방면, 31302)
🚍 225, 415, 472, 513, 518, 533, 725, 735, 753, 754, 1452, 1715번
울산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울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전시해놓은 역사실과 오늘날 산업 수도 울산의 성장과정과 산업 발전사를 조망하고 있는 산업사실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어린이 체험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건축 디자인과 첨단 전시 그리고 교육 시설을 갖춘 문화공간으로서 역사적 전시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이나 영화 상영,가족 워크샵 등 다양한 문화 이벤트 또한 개최되고 있는 복합문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시설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안내 말씀 드릴 것은 현재 내부 전시 새단장을 위해 산업사실이 휴실 상태입니다.
상주해 계시는 해설사님의 안내로는 오는 7월에 오면 산업사실을 둘러볼 수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울산박물관 산업사실만 따로 빼서 다음 7월에 새로이 단장된 산업사실을 소개해 보도록 할게요.
그리하여 오늘 제가 준비한 내용은 울산박물관 역사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울산박물관 역사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었으며 울산의 선사문화, 삼한시대 울산, 삼국시대 울산, 울산의 불교문화, 통일신라시대 울산, 고려시대 울산, 조선시대 울산, 근대 울산의 모습과 에필로그 순으로 스토리라인이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구석기시대에는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고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교과서적인 내용과 함께 우리 울산에서는 무거동 옥현 유적과 신화리 유적, 입암리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약 4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신석기시대에는 본격적으로 한 곳에 한자리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하고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사냥 또는 채집으로 식량을 얻어 점차 가축을 기르고 농사도 시작되는 등 자급자족의 시대가 시작되죠.
이에 울산에서도 신암리 유적, 우봉리 유적, 황성동 유적, 궁근정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요.
이들 유적은 주로 해안가와 강가에 분포하고 있는데 신석기시대의 울산 사람들은 식량과 자원을 얻기 쉬운 바다와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 이제 더 나아가 청동기 시대로 갑니다.
벼농사를 비롯해 본격적인 농정이 이루어진 청동기 시대에는 마을이 생겨나고 또 이 마을을 다스리는 지배자도 등장하게 되면서 울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청동기시대에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검단리 유적, 무거동 옥현 유적, 다운동 유적, 연암동 유적 등이 있고 이들 유적에서는 울산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후기 청동기시대의 영남 또는 동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문화 양상을 보여줍니다.
삼한시대 울산은 '진한'에 속하여 풍부한 철 생산지인 울산 북구 달천철장과 대규모 마을이 발견된 교동리 유적, 중국제 유물이 출토되는 창평동 유적, 대대리 하대 유적, 중산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은 삼한시대 울산 지역 정치 집단의 존재와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천철장에서 채광된 철광석은 삼한시대부터 울산과 경주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져 철제품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일본식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들 국가 또는 지역과도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삼국시대 울산은 3세기 무렵부터 지역 집단별로 서서히 신라에 통합되어 4세기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토기나 무덤을 만드는 방식 등에서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신라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울산은 신라의 철 생산지로서 신라 수도 경주 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물관에 왔으니 우리 지역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울산 울주군 청량읍에 있는 영축사는 바로 우리 울산 불교의 위상으로 부처를 모시는 금당을 비롯하여 동쪽과 서쪽 삼측석탑이 양쪽으로 위치한 쌍탑일금당의 가람배치는 물론 이를 통해 영축사는 경주의 감은사와 비슷한 규모로 다양한 유물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화려하게 번성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1962년 울산 중구 태화동 반탕골에서 발견된 태화사지 12지상 사리탑은 종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표면에는 12간지에 나오는 12마리의 동물을 새겨 넣어 이것을 승려의 부도로 보아왔으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사리탑으로 최근 판단하여 2010년 문화재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울산의 불교는 화려하게 번성했으며 신라의 유명한 승려들이 울산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울산 불교의 위상이 높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영축사 이야기를 잠시 했었는데요.
영축사 발굴지에서 금당에 모셔졌을 부처와 광배가 발견되어 부처의 상반신과 오른손, 무릎 일부는 결실되거나 파손되었고 왼손도 약지와 소지만 일부 남아 있어 이곳 울산박물관에서는 미디어 파사드형 전시를 통해 출토되어 남아있는 일부를 이용해 부처의 두상을 그림자로 입체화 시켜 보여주는 전시도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우리 울산은 울산은 통일신라시대 말 호족 출신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흥려부로 격상되는데 이때 울산의 중심지는 학성산과 토성이 있는 반구대 일대였으며 울산을 울주라 부르고, 별호는 학성이었으며 언양 지역은 헌양으로 불렀다가 언양으로 바뀌는 등의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어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습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지어 올려 고려시대 유적으로 삼정리 유적과 진현 압골 유적에서 청자 가마터 등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울산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고려는 고려만의 전통기술과 송나라의 자기기술을 받아들여 귀족사회 절정기인 11세기에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고 고운 점토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낸 자기인 청자를 만들어 냅니다.
울산에서도 삼정리, 천전리, 직동리 유적에서 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특히 삼정리 유적에서는 일반 생활에서 사용되는 청자가 또 직동리 유적에서는 관청용 청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제 조선시대로 왔습니다.
울주라 불렸던 울산이 울산군이 되는 시기로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특징 탓에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이에 병영과 수영이 설치되었고 남목에 지어진 남목마성이나 남목봉수대 등의 군사시설도 들어서게 됩니다.
울산의 육군병영과 수군병영에는 정기적으로 소속 군대원들에 대한 소집과 훈련이 시행되었고 전투함을 만들거나 목장 관리에도 참여시켜 생업을 병행하던 조선시대 울산사람들에게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조선시대 울산에서는 토성의 후예 그리고 사족화한 가문 등 외지 양반들이 주도한 향촌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울산 이씨(학성 이씨)가 대표적인 그 예로 조선 조기에는 향리를 담당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유향소, 향안, 향약, 서원, 사마소, 문중 등을 주심으로 향촌 사회를 주도하여 울산에서도 유향소의 좌수와 별감을 다수 배출하는 등 성리학의 덕목을 실천하면서도 향촌을 더욱 교화하여 지도층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향촌사회의 양반들은 같은 집안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형성하고 같은 계급과의 협업을 통하여 하층민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천자문, 소학, 사서를 읽고 주자가례 등의 예서에 기록된 종범 질서를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문물이 시작되었던 근현대 울산입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거쳐 대한제국이 되면서 우리의 울산은 도호부에서 군으로 개편되고 경상좌병영도 폐지되는 등 우편업무가 시작되고 시내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철도의 개통, 전등 개통, 철근콘크리트 다리 삼호교 개통, 비행장 개장 등 시대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울산에는 을사늑약이 있자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일의병부대인 산남의진에 가담한 김선일, 김치일, 김기준, 김춘길, 박선익 등의 인물들이 있으며 언양읍내를 공격하여 일본의 부속 기고나들을 습격하고 의병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벌입니다.
독립운동 또한 비밀결사의 형태로 나타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독립운동이 전개되며 울산청년회의 창립과 신간회 울산지회의 설립, 조선어학회운동, 항일기도회 및 신사참배 거부운동, 일제패망 예견 민족의식 고취 등 다양한 형태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신념 하나로 조국의 독립과 광복에 힘썼습니다.
울산박물관 개관 이래로 무려 500명 이상의 기증자가 약 20만 점 이상의 우믈을 기증하여 울산박물관 소장 유물 중 거의 70%가 기증유물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 울산광역시 민속문화유산 등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이를 통해 평가를 거쳐 유물로 등록되거나 기증자 예우를 위해 감사패와 기증증서를 발급 중에 있습니다.
이처럼 울산박물관은 과거의 시간이 고요히 쌓여 있는 공간이자 앞으로의 시간과 대화를 나누는 창으로 울산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다 보면 수천 년 전 고대 사람들의 숨결이 아직도 묻어나는 듯하고 전시된 유물 하나하나에도 울산이라는 도시가 지나온 길과 그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박물관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결을 손끝으로 느끼게 합니다.
오늘의 우리가 내일 누군가의 기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울산박물관이 들려주는 울산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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