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전
[부산시보]부산을 걷다- 욜로갈맷길 ① 동부산
길은 뭘까. 왜 걸을까. 길은 그렇다. 길만 걸으면 길밖에 안 보이지만 길에 어찌 길만 있으랴. 길 말고도 보이는 것들. 수평선 너머, 무지개 너머 뭉클한 그 무엇. 잠시 멈춰서 돌아보면 앞만 보고 걸을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
욜로갈맷길은 부산의 길. 갈맷길과 함께 가장 부산다운 길이다. 10코스가 있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의 약자. 사람을 중심에 둔 인문학의 길이 욜로갈맷길이다. 갈맷길이 그렇듯 욜로갈맷길 따라서 부산을 한 바퀴 다 걸으면 누구라도 자기를 귀하게 대한다. 누구라도 귀인이 된다.
욜로갈맷길 1코스 - 갈맷길 더 비기닝(9.1㎞, 3시간)
욜로갈맷길 10코스를 셋으로 나눠 소개한다. 동부산 욜로길과 원도심 욜로길, 그리고 서부산 욜로길이다. 동부산 욜로길은 1코스에서 4코스까지다. 기장 임랑에서 시작해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마친다. 이번 호는 임랑에서 기장 일광까지 1코스 구간을 걷는다. 3시간 거리다.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걸으면 사흘이 걸릴 수도 있고 내 바깥도 보고 내 안도 보고 걸으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임랑에는 어떻게 갈까. 버스로는 난망하다. 부전역에서 출발하는 동해선을 권한다. 부전역에서 50분 남짓 월내역이 정답이다. 역에 내리면 저 앞이 임랑해수욕장이다. 역에서 해수욕장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그냥 20분이 아니고 역사의 20분이고 문화의 20분이고 나무의 20분이다.
역사의 20분은 고색창연하다. 비석이 시작이다. 비석은 역 부근 월내어린이공원에 있다. 모두 4기다. 부산에 있는 옛날 비석은 300기 넘지만 여기 비석은 특이하다. 4기 가운데 3기가 한 사람 이름을 새겼다. 고관이나 대작이 아니고 유명인이나 명사가 아니다. 100년 저쪽 평범한 장사치다.
보부상 반수(班首) 배상기
비석에 새긴 이름은 배상기. 직책은 보부상 ‘반수’였다. 반수(班首)는 보부상 우두머리. 월내 일대 젓갈 팔아서 벌어들인 돈을 정승처럼 썼다. 장학사업에 팍팍 썼으며 ‘밥 퍼’ 빈민구제 사업에 팍팍 썼다. 월내어린이공원에 무료 급식소가 있는 게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역사는 이어진다.
문화의 20분, 나무의 20분은 묘관음사와 500년 해송이 주역이다. 묘관음사는 역에서 해수욕장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보인다. 성철스님과 스님의 딸 불필스님 일화가 서린 선맥(禪脈) 법통 사찰이다. 500년 해송은 해수욕장 다 가서 왼쪽에 보인다. 같이 선 200년 해송이 ‘아가’ 같다.
드디어 임랑해수욕장. 임랑에선 금모래 은모래만 걷지 말자. 바다 저 너머 수평선도 걸어보자. 마음이 가벼우면 수평선인들 못 걸을까. 수평선은 귀하다. 지구가 처음 생긴 그때 그대로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세태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가치가 수평선이다.
수평선은 얼얼하다. 쿡쿡 쑤셔댄다. 나는 한결같았던가. 눈앞의 이익을 차마 어쩌지 못해 오늘 다르고 내일 달랐던 숱한 나. 이해는 되면서도 없던 일은 되지 않는다. 수평선을 걷는 일은, 수평선을 보며 걷는 일은 참 얼얼하다.
해수욕장 길은 임랑 끄트머리에서 갈라진다. 저리 가면 기장 좌천, 곧장 가면 칠암이고 일광이다. 갈라지는 길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이 길과 저 길. 길은 늘 두 가지다. 이 길과 저 길. 간 길과 가지 않은 길.
처음에서 멀어지는 길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두 가지 길은 또 있다. 처음에서 멀어지는 길과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처음에서 멀어지는 길은 인생길이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행길이다. 돌아갈 수 없을 만치 처음에서 멀어졌다는 회한이 들 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행길은 고맙다. 부산의 욜로갈맷길 역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 고마운 길이다.
임랑 다음은 문동, 문중. 외지인에게 익숙한 지명은 아니다. 지명 둘 다에 들어간 문은 마을 뒷산인 문산(文山)에서 유래한다. 문오동은 문산 주위 다섯 마을을 이른다. 문동, 문서, 문상, 문중, 문하다. 문동은 문오동 본동에 해당한다. 문중은 문동 다음 마을이다.
기장은 포구 일색이다. 앞에 소개한 월내, 임랑이 포구고 문오동의 문동, 문중이 포구다. 동부산 욜로길을 맨 앞에서 여는 기장은 포구의 도시다. 포구는 어촌계 기준으로 열여덟. 부산에서 가장 많다. 길천-월내-임랑-문동-문중-칠암-신평-동백-이동-이천-학리-두호-월전-대변-신암-서암-동암-공수, 이 모두가 기장이 품은 포구다.
등대의 도시 부산
보이는 등대가 늘어난다. 포구마다 엔간하면 있다. 등대는 느낌표다. 감동적인 문장의 끝에 찍는 부호, 느낌표! 바다와 맞닿은 포구는 육지의 끝이다. 제 키보다 몇 배는 높은 파도에 맞서서 일군 역동의 현장이다. 느낌표 말고 무슨 부호를 찍으랴. 느낌표 말고 무엇으로 그 감동을 드러내랴.
사실, 부산은 느낌표의 도시다. 등대의 도시다. 광역 대도시 가운데 등대가 가장 많다. 바다를 면하지 않은 도시는 그렇다 치고 인천보다 많고 울산보다 많다. 2025년 3월 기준 등대 수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설을 제외한 국유 무인등대, 유인등대, 방파제등대 다 합쳐서 인천은 50, 울산은 40, 부산은 자그마치 86이다. 한국에서 비교 불가 등대의 도시가 부산이다.
동부산 등대의 절정은 칠암이다. 문동, 문중에서 간간이 보이던 등대는 칠암에 이르러 한꺼번에 솟구친다. 칠암은 붕장어마을. 비비 꼰 붕장어를 조형한 붕장어등대, 뜨는 해와 갈매기를 조형한 갈매기등대, 그리고, 최동원등대로 불리는 야구등대. 이런 부류의 등대를 통틀어 조형등대라고 한다. 지역의 특성을 한껏 살린 등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칠암을 지나 일광 이동방파제에서 보는 등대는 다섯이다. 흰색이 있고 붉은색, 초록색이 있다. 색은 등대의 언어다. 색이 다르면 등대의 언어도 다르다. 방파제 맞은편 육지 끄트머리 등대는 색이 유별나다. 별색이 섞였다. 등신(燈身)을 삼등분해 위아래는 검고 가운데는 노랗다. 근처를 지나는 배는 동쪽으로 가라는 등대의 당부 말씀이다. 안 그러면 암초를 만난다. 위아래가 노랗고 가운데가 검으면 서쪽이다. 남쪽, 북쪽 등대도 있다.
‘동서남북은 일정한 방향이지만 전후좌우는 정해진 방향이 없다.’
중국 지식인이 쓴 글이다.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는 격변기를 살았던 그 지식인은 불우했다. 되는 일이 없었다. 각고 끝에 얻은 문장이 ‘동서남북 일정지위야 전후좌우 무정지위야(東西南北 一定之位也 前後左右 無定之位也)’이다. 전과 후, 좌와 우는 언제든 바뀐다. 답답하고 막막할 때 몸을 돌려세우듯 마음을 돌려세워 보라. 혹시 아는가.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일는지.
욜로갈맷길 1코스는 일광 바다에서 마무리한다. 단편소설 ‘갯마을’ 문학비가 반갑고 하얀 쌀밥 같은 꽃 이팝나무공원이 반갑고 고산 윤선도 유배지 치유의 거리가 반갑다. 윤선도 시를 새긴 삼성대 시비는 반갑다가도 ‘급’ 실망이다. 공사판이 됐다. 좀 살살 했으면…. 좀 배려하며 했으면….
동부산 욜로갈맷길을 여는 기장은 부산 동단(東端)이다. 동쪽 첫 도시다. 동부산 맨 앞에 닻을 내리고서 부산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끌어당긴다. 동쪽은 해 뜨는 곳, 아침이 좋은 곳. 해를 등 뒤에 두고 걸어보라. 걷는 사람이 해처럼 환하게 보이고 아침처럼 환하게 보이는 부산의 길, 거기가 동부산 욜로갈맷길이다.
글·동길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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