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600살 천연기념물 제64호 은행나무를 찾아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중리마을로 향합니다.

반구대 입구를 지나 왼편에 있는 구랑 마을을 지키고 있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내력을 포스팅합니다.

울주군의 군목이 은행나무여서 상징성이 높아 설레는 두서면 구랑리 은행나무입니다.

힘차고 바르게 뻗어가는 강직성은 줄기차게 살아가는 굳건한 군민의 기상을 나타내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화석이라 칭할 만큼 수명이 길어 울주군의 무궁한 번영을 상징하고 있기도 합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25그루 중 울주 두서면 구량리 은행나무입니다.

2013년 국가유산청과 국립산림과학원 '천연기념물 노거수 육성 보존 사업'에 선정되어 관리 중입니다.

국도 제35호 반구대로를 달려 울주군 구량리 송정마을 안으로 들어갑니다.

고운산(760.8m)에서 발원된 구 량 천을 끼고 구량 보건 진료소와 ’고운대안중학교‘와 송정마을회관을 차례로 지나갑니다.

울산 유일의 대안중학교는 입시 위주 주입식 교육 대안으로, 인성과 감성, 자기 주도적 자발 교육, 공동체 교육으로 행복한 사람 육성을 목표로 교육하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송정마을은 토지가 비옥해 수렵과 농경이 발달하여 선사시대부터 살았던 풍요로운 농촌 부자마을이기도 합니다.

고헌산 아래 구량교를 넘어 중리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차리와 송정마을 가운데 있어 중리라 합니다.

경주 이씨 집성촌이었으나, 차츰 경주 등지로 흩어지고. 대신 김해 김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는 마을입니다.

농업에 종사하고, 양계·양돈 등 축산업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마을은 1968년 울산 동양나일론 회사와 자매결연으로 마을 숙원사업 등을 지원받아 발전을 꾀했습니다.

또 마을금고 사업을 육성시켜, 현재 많은 공동 재산을 보유한 부자 마을입니다.

멀리 고헌산이 보이는 골목길 담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은행잎과 나무의 벽화도 색다른 분위기입니다.

고즈넉한 한옥의 낮고 긴 담장을 타고 길게 뻗어 나간 담쟁이가 유장합니다.

사람 대신 고양이가 넘나드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는데 짖는 개 울음소리 놀라게 했습니다.

공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며 줄행랑으로 골목을 벗어났습니다.

청보리가 자라는 넓은 논에 있는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에 당도했습니다.

줄기에서 시원하게 뻗어 나간 가지들이 청순한 수형입니다. 나뭇잎의 순결한 신록이 명품입니다.

환하게 웃는 아기의 고운 웃음 같은 모습이 황홀합니다.

600년 넘게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많은 세상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원귀와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 신령한 토테미즘이 일어납니다.

파리한 잎에서 고목의 연서를 읽으며, 사연이 묵직한 고목의 잠언을 음미해 봅니다.

2003년 태풍 매미에 1/3가량 가지가 부러졌다고 했습니다. 거대한 지지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둘레도 12.9m에서 8.37m로 감소했고, 나무 높이는 22.5m입니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행단(杏壇)의 의미가 있습니다. 학문 혹은 학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향교나 문묘에 심었습니다.

선비가 살던 고택이나 별서(別墅)에 심었고, 마을 입구에 심은 곳도 있습니다. 성균관의 후 신인 성균관대학교 마크이기도 합니다.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도 조선 초기 이지대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중리마을에 낙향하면서 서울에서 가지고 와 행단(杏壇)의 뜻으로 집 근처 연못가에 심었다고 했습니다.

이 나무는 이 씨 외 다른 성의 사람이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못 낳는 아낙이 나무 밑에 있는 구멍에 비손하면 소원 성취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그러나 1981년 수명 연장을 위해서 그 구멍을 시멘트로 메우는 시술을 해서 흉측합니다.

은행나무 앞에 세운 '한성부 판윤 죽은 이공 유허비‘를 읽어 봅니다. 죽은 은 이지대 선생의 호입니다.

1394년 조선 태조 때 경상도 수군만호 재직 시에 왜구의 배를 붙잡은 공을 세웠습니다.

벼슬은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다 1452년 단종 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그 후원과 연못은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쉬는 정자나무가 되었습니다.

마을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재우(齋宇)인 이리재(二履齋)가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라 열매는 열리지 않지만, 연초록 잎사귀의 푸르름으로 가득한 기운을 마구 내뿜어냅니다.

왕성하고 신비한 그 생명력을 복제해 마음에 담아 봅니다.

구량천을 따라 하차리 중차리, 상차리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차리 마을은 옛날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는 지금의 상·중·하 차리를 합해 차동이라 불렀습니다.

이 차동은 남중리 다음 동인 차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차리 마을 명칭이 되었습니다.

또 중차리를 덕산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차리 뒷산이 우덕산(于德山)이었기 때문에 연유되었습니다.

구량천을 따라 길이 1.5km 양쪽 도로변에 서 있는 1,000여 그루의 벚나무는 차리 마을 주민들이 심고 가꾼 나무입니다.

봄이면 하얀 벚꽃 터널 길을 만들지만, 지금은 녹음의 터널 속을 걷는 기분입니다.

군데군데 부락이 보입니다. 정미소 지나 차리 저수지로 향합니다.

가는 도중에 경주 김씨 재실 앞에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반깁니다. 원래 열두 그루가 있었으나 고사했고 했습니다.

경주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상차리는 32호나 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12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라 했습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1980년대 이래 양계·양돈의 축산업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차리저수지가 우람하게 보입니다. 차리천을 타고 흘러가면 반구대를 지나 100리 물길 태화강에 합류됩니다.

그 아래 계곡에는 한때 유명한 자수정을 채굴한 바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이 되었습니다.

해발 1,033m의 고헌산에는 예로부터 머루·다래뿐만 아니라 희귀한 산채·약초들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또 소호령 고원 분지에는 <두서면 농업경영인 단체>에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여 소득원을 확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옛날에는 땅값이 비싸서 한 마지기 이면 소호리 열 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을 돌아서 나오는데 상차리 경로당 방향으로 소호령 옛길과 함도골, 선필로 가는 길이 유랑을 유혹합니다.

{"title":"울주 두서 구량리 은행나무의 내력","source":"https://blog.naver.com/ulju_love/223928277606","blogName":"울산광역시..","domainIdOrBlogId":"ulju_love","nicknameOrBlogId":"울산광역시울주군청","logNo":223928277606,"smartEditorVersion":4,"meDisplay":true,"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