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시간 전
충남의 전통사찰 l 신록을 향한 걸음 '공주 신원사'
신라 서악, 고려 남악,
조선 중악(中嶽)의 국가수호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매화가 흩날리며 물러나고
벚꽃도 흰 숨결처럼 산길을 비워둔 그 자리
연둣빛 새순은 조용히 신록을 준비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 손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햇살은 그들을 어루만지듯 내려앉고
기와 위에 남은 꽃그늘도 이젠 바람에 등을 내어줍니다.
돌계단 틈 이끼와 새싹까지 말을 트고
법당 마루 끝, 발소리보다 느린 시간 속에 자신을 물들입니다.
천년을 지켜온 공주 신원사의 봄은 이제 신록을 향해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듯
이 산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신원사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통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 말사입니다. 계룡산은 전국 4대 명산으로 불리는데 동학사(동), 갑사(서), 신원사(남), 구룡사(북) 등 동서남북 방위별로 4대 사찰이 있었지만, 현재는 구룡사가 폐사되어 3대 사찰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찾은 신원사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을 배경으로 연천봉과 사이를 흐르는 계곡에 자리를 잡아 최승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에서도 계룡산의 지위는 특별납니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예언한 정감록(鄭鑑錄)과도 연계되면서 민간신앙의 영지로 주목받았고 무속신앙이 유독 번성했습니다. 지금도 신원사를 향하는 길가에는 굿당과 신집, 점집들로 즐비합니다. 신원사 동쪽 신도안(新都內)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해 한때 궁궐조영공사(충남 유형문화재)를 추진했다가 중단한 곳입니다. 지금도 당시 초석이 남아 있는데 여러 차례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거론됐습니다.
신원사 창건설화는 651년(백제 의자왕 11년) 열반종의 개산조 보덕화상(普德和尙)에서 기원합니다. 보덕화상은 원래 고구려 승려로 평양 영탑사를 창건한 고승인데 당시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 숭상 정책으로 불교를 소홀히 하자 백제로 내려와 전라도 완산주에 경복사를 창건하고 백제불교를 크게 중흥했던 고승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어 신라말 도선(道詵)국사가 신원사에 찾았을 때 법당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중창에 나서고, 1298년(고려 충렬왕 24) 무기(無奇)화상이 중건하는 등 중수를 거듭합니다. 이후에도 1394년(조선 태조 3) 무학(無學)대사의 중창, 1644년(인조 22) 삼욱(三旭)스님의 노사나불독존상괘불 제작, 1866년(고종 3) 충청 관찰사 심상훈의 중수, 1876년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은 보연(普延)화상의 중건, 1906년 일봉화상의 중건 등 여러 차례 고치거나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찰 이름도 시대별로 여러 차례 바뀌면서 신정사(神定寺)에서 신원사(神院寺)를 거쳐 조선 1866년(고종 3)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의미로 신원사(新元寺)로 이어집니다.
가람의 배치는 계룡산을 배경으로 남쪽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 중심의 동서(東西)와 금당(대웅전) 앞 부처님 진신사리 오층석탑의 중앙을 연결하는 남북(南北) 일직선 위의 사천왕문 등 일 탑 일 금당의 전통적인 백제가람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가람 동쪽으로 조선 왕실이 건립한 궁궐형태의 계룡산 중악단과 남측에 고려 시대 건립한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신원사의 원래 사찰 터는 중악단 남측 넓은 농경지에 있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주문은 비교적 최근에 건립된 것으로 입구 방향에서 해태 한 쌍과 함께 ‘계룡산신원사(鷄龍山新元寺)’라는 현판이 걸려 신원사 경계임을 알려주고, 반대편 후면에는 출구 방면으로는 석룡 한 쌍과 ‘계룡중악열반종찰(鷄龍中嶽涅槃宗刹)’의 현판으로 천년고찰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 동서남북 불법을 수호하고 사부대중을 보호하는 사천왕문을 들어서 본격적인 경내에 진입하게 됩니다. 사천왕문에는 동으로 지국천왕, 서로 광목천왕, 남으로 증장천왕, 북으로 다문천왕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고대 인도 종교에서 등장했던 귀신들로 불교에 귀의하면서 사찰 입구에서 악귀를 막아 불법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원사에는 석탑이 2곳에 있습니다. 모두 오층석탑인데 하나는 대웅전 앞뜰의 석가여래진신사리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악단 전면 남측에 있습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중악단의 오층석탑(충남 유형문화유산)으로 언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1975년 해체 복원 당시 1층 사리공에서 사리구와 녹색 유리 긴 사리병을 비롯해 중국 동전인 개원통보(당나라)와 함원통보(송나라), 황송통보(북송) 등이 발견되면서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2개 기단 위에 5층 탑신은 현재 4층 옥개석(지붕돌)까지만 남아 있는데 탑의 몸체가 기단보다 둔중하고 지붕돌 폭이 비슷해 안정감과 중후한 느낌을 줍니다. 탑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목조건축 기둥을 모방한 것으로 마치 나무로 만든 탑처럼 보입니다. 석탑의 서쪽에는 예를 갖출 때 쓰이는 배례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마당의 오층석탑에는 석가여래진신사리탑으로 불리는데 최근에 조성된 것입니다. 오월은 부처님 오신 날 관계로 대웅전과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연등이 걸려 석탑을 제대로 살피기는 어려웠는데 좌우의 석등도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대웅전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대웅전(충남 유형문화유산)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번 다시 지어졌는데 현재 건물은 보연 화상이 지은 것입니다. 전면과 측면 모두 3칸씩 아담한 규모이지만, 화려한 팔작지붕에 살짝 올려진 처마가 우아한 멋을 보여줍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한 다포양식에 연꽃을 조각했는데 화려하지 않고 간결한 양식입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깔고 약한 배흘림 원형기둥으로 안정감으로 주고 전면 3탄에는 모두 4분합문을 달았지만, 측면과 뒷면에는 이를 생략한 판장벽 형식입니다.
내부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불단은 주존인 아미타여래를 기준으로 오른편에 대세지보살, 왼편에 관세음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불단 앞으로 2개의 나무 기둥이 세워져 닫집을 설치해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삼존불 후불탱화는 보응 문성이 그린 영산회상도가, 같은 시기 그려진 불법 수호의 호법신을 묘사한 신중탱화(제석천룡도)가 서쪽 벽에 걸려 있습니다. 삼존불 오른편에는 왼쪽부터 도선(道詵), 보덕(普德), 무학(無學) 대화상 등 삼화상의 진영이 걸려 있습니다.
대웅전을 나와 동쪽에는 영원전(靈源殿)이 서쪽을 향합니다. 보통 사찰에서 명부전이라고도 불리는 전각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근래에 세워졌습니다. 내부는 우물마루 바닥을 깔고 ‘ㄷ자’ 모양의 불단을 조성해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의 지장삼존과 시황, 판관, 녹사, 사자, 인왕 등이 모셨습니다. 맞은편 독성각은 전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전각에 최근 그려진 독성도와 1907년(융희 1) 제작된 칠성도와 보련당 진영 등을 모셨습니다.
독성각 남쪽은 최근 조성된 노사나전이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세워져 국보인 노사나불괘불탱을 모시고 있습니다.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부처 대신 부처의 그림을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사용되는 대형 그림입니다.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것으로 문화유산청(자료마다 크기를 달리해 이를 기준 삼음)은 테두리를 포함해 가로 650.6㎝에 세로 1082.6㎝에, 실제 화면은 611.3㎝ × 951㎝의 초대형 괘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괘불의 본존불 두광 가장자리에는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 원안에 한 글자씩 적어 노사나불 탱화임을 밝히고 있는데, 보통 법신 노사나불은 보신 노사나불과 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좌우 협시불로 배치하는 것이 통례인데 신원사 괘불은 특이하게 중앙에 단독으로 노사나불을 화면 가득 채우고 신체에 비해 큰 손바닥을 들어 올려 설법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노사나불 좌우로 각기 다른 물건과 두광, 옷색의 차이 등을 이용해 10대 보살을, 보살 위편으로는 10대 제자들은 서로 다른 얼굴 방향과 표정, 자연스러운 동작과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사천왕은 입상으로 묘사되고 상단에 벽지불과 비천(飛天)이 배치된 군도 형식을 취하면서 구도상 좌우 횡렬의 2단 구조로 나눠 노사나불이 대중을 내려다보게끔 그려져 있습니다.
채색은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해 옷을 표현하고 군데군데 금니와 중간 색조를 많이 사용돼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배경의 ⅔는 본존에서 뻗어 나오는 오색의 광선문으로 메우고 5가지 색으로 빛을 형상화해 화면 전체에 화려함을 더해줍니다. 이처럼 짜임새 있는 구도와 섬세한 표현, 밝게 표현된 색조 등 세련된 솜씨는 조선 후기 불화 양식을 보여주며 17세기 대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화기에는 시주자 목록과 증사, 지전, 화원, 화사, 주지등 제작 참여자 이름과 ‘갑신 유월 신정사 대영산회탱 조성’을 기록해 1664년 응열(應悅), 학전(學全) 등 5인의 금어가 그렸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신원사가 다른 전통사찰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은 1879년(고종 16) 계룡산신(鷄龍山神)을 모시는 중악단(中嶽檀)이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원사 동편 국가적 산신각이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묘향산에 상(上)악단이 지리산에는 하(下)악단을 함께 만들어 무속에 기댄 왕실 기도처가 마련됩니다. 현재 상·하악단은 사라져 유적 내용을 알기 어렵지만, 신원사 중악단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중악단은 왕실에서 산신에게 복을 비는 장소인데요, 예로부터 계룡산이 신령스럽게 받아들여져 신라에서는 오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 건국에 자주 등장하는 무학대사가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고 태조 이성계에게 알리자 1394년부터 제사를 지냈다가 1651년(효종 2) ‘미신타파’의 명분으로 제단이 폐지되고 제사를 중단하지만, 유난히 무속에 심취한 명성황후의 희망으로 1879년(고종 16) 신단을 다시 짓고 중악단을 지었다고 합니다. 물론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시기, 계룡산의 도참설을 무마하고자 했던 점도 배경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왕실 주도로 건축된 중악단은 구릉지에 동북과 서남 방향을 중심축으로 삼아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이 일직 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 담장을 둘러 공간구성에 단묘(壇廟) 건축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했습니다. 중악단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감실(나무상자)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건축은 1.5m의 높은 돌 기단 위에 전면과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다포 양식의 조선 후기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과 장식을 화려하면서 위엄을 부렸습니다.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장식적 기법을 적용해 왕실 건물임을 보여주는 조선 말기의 빼어난 건축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내외 벽면을 장식한 벽화들도 19세기 사찰 미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는 평가입니다. 산수화와 고사인물도, 천상의 선녀들을 그린 이 벽화들은 독특한 판벽 구조 위에 그려져 더욱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초록 바탕의 포벽화와 다채로운 벽화는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교를 피해 불교 중흥을 목표로 조국(고구려)마저 버리고 백제를 선택한 보덕화상이 창건한 신원사에 부처 대신 산신을 이처럼 거대하게 받드는 중악단이 설치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포교 과정에서 토속신앙과 결합해 지금도 사찰에는 삼성각이나 산 시각 등이 있지만 본말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더욱이 당시 흥선대원군과 결별해 왕권을 찾은 고종이 근대화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왕비는 전근대적인 무속에 집착해 복을 빌겠다며 수시로 굿판을 벌여 국가재정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공양미로 쌀밥을 지어 이를 강물에 뿌려 물고기를 먹이는 공덕을 자주 베풀었는데,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구제보다 많은 재물을 들여 왕실 번창의 더 많은 공덕을 빨리 쌓는 것이 왕비에게 더욱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무속에 허우적대는 왕비의 공덕이 쌓일수록 국고는 빠르게 바닥났고 군인들의 급여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모래와 쌀겨를 섞은 엉터리 식량 지급에 분노해 임오군란(1882년)이 발생했고, 간신히 궁에서 도망친 왕비는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에 복귀한 뒤 더욱 무속정치에 빠져듭니다. 심지어 일개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내주었는데 이 무당이 공개적으로 매관매직과 국고 탕진으로 나라를 혼돈으로 몰고 들어가는 등 또다시 민중 항거의 한 원인이 됐는데도 정작 왕비는 반성은커녕 또다시 외세를 끌어들여 백성을 탄압하고 황후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어처구니없이 일본 낭인의 칼날에 처참히 시해당하게 비운을 맞습니다. 한때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국난극복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드라마나 오페라 등이 유행했지만, 역사 왜곡의 비난이 거세지고 대한제국 패망에 큰 원인을 제공한 그의 어처구니없는 기행이 속속 드러나면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신원사에서도 이 같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중악단 입구에 별도의 안내문을 걸고 “명성황후의 역사적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으로 남길 것”과 “명성황후를 단지 국모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험난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한 여인의 한과 염원, 남편과 자식을 위한 소원의 공간으로서 중악단”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 역시 이 중악단이 무속의 대상이기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우리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이정표의 역할로 길이 보존되길 기원합니다.
공주시 신원사
○ 위 치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 (전화 041-852-4230)
○ 운 영 : 연중무휴 (일몰 이후 출입제한)
○ 입장료 및 주차장 : 무료 (사찰내 주차 가능)
* 취 재 : 2025년 5월 10일 등
< 참고문헌 >
김현진. (2021). 한국 사찰의 산신 수용과 의례. 한국학논집, 83, 293-319.
이해준. (2013). 조선조 계룡산 중악단의 문화사적 의미. 역사민속학, (41), 49-71.
고마리. (2023). 정감록에 나타난 계룡산의 성지화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은우. (2024). 계룡산국립공원 내 사찰과 불교조각. 국립공원연구지, 15(1), 120-130.
전통사찰총서 12 - 대전·충남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9년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2-공주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8)
충청남도지정문화재해설집, 충청남도, 2001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정보(https://www.khs.go.kr)
충남디지털문화유산(https://www.chungnam.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https://www.aks.ac.kr/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휘리릭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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