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전
논산 노성면 또 다른 영당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
여러분은 영당[影堂]이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영당은 덕이 높고 영향력이 큰 분의 영정을 모신 곳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귀한 영당이 논산시 노성면에는
두 곳이 있답니다.
한 곳은 명재 윤증 선생을 모신 유봉영당이 있고 또 하나 이곳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에 학성군 김완 장군의 영당이 있어 드물게 문.무 모두의 영당이 있는 것이랍니다.^^
지난 24년 11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우연히 만난 논산 노성면의 또 다른 영당인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을 발견했답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논산의 무장으로 유명한 백일헌 이삼 장군의 종택이 상월면에 있으니 영정의 모습이 어떤가 궁금해서 들러 보았던 것인데 그런 곳을 25년 5월 6일 다시 다녀왔습니다.
1997년 논산시 향토문화재로 등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요.
입구의 왼쪽에는 '김해 김씨 운산공유적지'라고도 새겨진 바위가 우뚝 서 있답니다.
입구에는 이렇게 오석에 시조부터 시작해 김해 김씨 감무공파에서 사군파, 운산공파로 이어져 논산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리는 운산공파의 소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들어가면 야트막한 경사지에 이렇게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학성군 김완장군의 묘소는 없더군요.
이 묘소는 학산공파의 선조를 모신 것이랍니다.
담장의 안쪽 왼편에 비석이 보이죠? 김해 김씨 운산공파의 중시조인 운산공 김세중의 묘인데요.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것은 해남에서 태어나 외가인 공주를 왕래하던 김완의의 손자인 운산공 김세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하며 그래서 김해 김씨 운산공파 중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묘소 제일 높은 곳에는 산신제단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오래된 곳으로 보입니다.
왼쪽, 묘지를 지나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팝나무가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으면 도로변이 잘 단장된 담장 옆으로 와가가 보입니다.
와가로 가다 보면 가문의 봉사에 대한 칭소하는 비석이 여럿 있고, 학성군 김완장군의 신도비로 보이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김완장군 영당의 정면에서 본 대문의 모습입니다.
조선 중기 무신 학성군 김완 장군[1577~1635]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요.
가까운 상월의 백일헌 이삼장군과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입니다.
조선 중기 무신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鶴城君 金完將軍 影堂]은 양무공 영당(襄武公 影堂)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김완 장군의 영정 사본을 모신 영당으로 1956년 지어졌다고 합니다.
영당은 1996년 12월 30일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노성면 병사리의 유봉영당과 함께 영당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묘소는 고향인 전라남도 영암에 있으며 원본 영정도 그곳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 [鶴城君 金完將軍 影堂]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 산 44-5번지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김완의 영정을 모신 영당. 1996년 12월 30일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향토문화유산 지정 1996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 산 44-5번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1956년에 건립하였으며 보물로 지정된 김완 초상의 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양무공 영당(襄武公影堂)이라고도 한다.
김완은 본관 김해(金海)이며 자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서 전공을 올려 용맹을 인정받았다.
1615년(광해군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하여 고산진 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를 거쳐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2)에는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 되었으며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과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양무영당[襄武影堂]이라고 쓴 현판이 묵직하게 걸렸습니다.
열려 있어 영당 안을 볼 수 있는데요.
이날은 발을 쳐 가려 두어 영정을 볼 수는 없더군요.
학성군 김완장군의 후손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자랑스러운 선조에 대한 예의로 세운 학성군 김완 장군 영당인데 많은 글에서 고향을 잘 못 소개해 이곳 노성면 줄림리가 마치 장군의 고향으로 오해가 빚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김완장군 영당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마루로 836-11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죽림리 산43-5)
주차 : 충분한 공간 있음
취재일 : 2025년 5월 6일
학성군 김완 장군[鶴城君 金完 將軍]
김완[金完 1577~1635]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인 조선 후기 무신으로 영암군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사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합니다.
김완은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 영특했으며, 기개와 용맹함은 20세가 되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가 싸웠고 남원 지역의 왜적들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며 왜구들이 조선을 다시 침범해 각처에서 피해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경상도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방이 왜구들로 막혀서 낭패를 겪게 되었는데 이때 김완은 남원 지역의 진사 조경남(趙慶南)·정사달(鄭士達) 등과 의기투합하여 일대의 왜적들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당시 전력은 겨우 20여 명에 불과했고, 활을 가진 자는 김완을 비롯하여 겨우 네 사람뿐이었으나 김완 등은 왜적을 궁장현[현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으로 추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여 조경남과 함께 용맹을 발휘하여 한 발의 실수도 없이 활을 쏴서 왜적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이 전투 과정에서 팔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하였고, 이를 본 왜구들이 김완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 왔으나 조경남이 쏜 한 발의 화살로 김완을 추격하는 왜적을 쓰러뜨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팔이 부러진 김완은 박언양·박필남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쳐 20명의 왜적을 참살하였고, 적에게 붙잡혀 있던 고한부 등의 포로를 구출하였다고 전합니다.
이후 곡성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요천(蓼川) 지역에 침범하자 출전하여 수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고, 구례 산동 지역에 왜적들이 진을 쳐서 피해가 많다는 제보를 듣고 조경남과 함께 군사 10여 명을 이끌고 적진을 습격할 것을 계획하던 중 양덕해와 고민덕이 2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면서 세 갈래로 나누어서 왜적을 습격하니, 적들은 혼란에 빠져 왜구 50여 명의 머리가 베어졌고, 나머지 잔병들은 모두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후 조경남과 작별하고 원래의 목적지였던 영암으로 향하다가 남원 황산(荒山) 장치(獐峙)에서 다시 왜적을 만나 홀로 수십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이때 흘러내린 왜적의 피가 바위를 물들여 사람들이 바위 이름을 ‘혈암(血巖)’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때의 공으로 김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답니다.
논산 10기 서포터즈 조현화
- #논산
- #논산시
- #영당
- #유봉영당
- #김완장군영당
- #김완장군
- #논산가볼만한곳
- #문화재
- #향토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