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문화유산, 선비의 고장 곡성의 상징 안향 선생 기리는 도동묘
곡성이 선비의 고장인 까닭
선비란 유학자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입니다. 조선 시대의 상류계층인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선비의 자격부터 갖추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양반 가문 출신이라 할지라도 선비의 소양이 부족하면 관직에도 나가지 못할뿐더러, 존경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중인이나 상민 계층 일지라도 학식이 깊고 인격이 높으면 선비로 인정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비가 반드시 양반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선비의 자격을 갖춘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나 도덕과 양심을 존중하는 문화가 그 지역을 지배할 때, ‘선비의 고장’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스승을 기리는 서원과 사당도 ‘선비의 고장’이라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곡성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을 기리는 도동묘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런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동묘가 곡성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안향 선생을 기리는 사당 도동묘
도동묘는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세워진 사당으로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성리학의 창시한 주자와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고려의 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서 1676년(숙종 2) 후손인 안호가 건립하였습니다. 애초에는 오곡면 승법리에 묘각을 건립하고 안향의 영정을 모셨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폐쇄되었습니다. 1920년 전라남도 유림과 순흥안씨 문중이 주도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안향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곡성 지역의 유림과 순흥안씨 종중에서 해마다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성리학은 선비의 정신적 토대입니다. 성리학의 큰 스승 주자와 안향을 모신 사당을 짓고 그 유산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곡성을 ‘선비의 고장’으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
우리나라 선비들이 이념의 멘토로 삼는 주자에 대해 짧게 알아보겠습니다. 주자는 송나라 유학자로 1130년에 태어나서 120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려가 무신란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습니다. 20대 이후부터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즉 유학을 줄기차게 공부하여 학문적인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했습니다. 이를 신유학, 주자학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으로 불리게 됩니다.
동아시아를 뒤흔든 새로운 학문 주자학
공자의 사상체계가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는데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고민하던 주자는 불교의 교리인 화엄(華嚴)에서 비롯된 정교한 이론체계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존 유학의 체계 위에 독자적인 이기론(理氣)론의 세계관을 구축합니다. 주자는 이(理)가 만물을 생성하는 에너지원임에 주목하고 이(理)를 다스려 완전한 성(性)에 이르는 전인(全人)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안향이 주자학에 매료된 이유
안향(安珦)(1243~1306)은 고려의 문신으로 주자학을 고려에 최초로 도입하여 전파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12세기 무렵의 고려는 권문세족의 횡포, 불교의 타락, 거듭되는 무신정변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겪으며 학문에 대해서는 암흑기나 다름없었습니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비록 무신인 최충헌이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가 송광사 중창을 통해 큰 결실을 거두면서 유학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옵니다. 덕분에 주자학이 고려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실천적인 학문탐구와 그것을 통한 현실 개혁에 대한 의지가 팽배했습니다. 안향도 그런 열망을 가진 유학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혼란 상태에서도 안향은 꾸준히 올곧은 관리의 길을 걸으며 고려를 안정시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1289년 충렬왕, 공주와 왕자를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가게 됩니다. 그때 주자의 저서들을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아 주자의 서적을 필사하고, 주자와 공자의 초상화를 베껴서 이듬해(1290년) 고려로 돌아옵니다. 안향은 주자가 설파한 새로운 유학(儒學)을 고려의 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고려의 사대부들을 개혁세력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훗날 그들은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주역이 되어 자신들이 정신적인 토대로 삼았던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향은 고려의 문신이었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삼고 조선왕조 최초로 풍기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한 소수서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도동묘가 곡성에 세워진 이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16세기 초 안향의 후손인 순흥안씨가문의 선비 ‘휘’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곡성으로 들어와 살게 됩니다. 순흥안씨 곡성 입향조입니다. 당대 유명한 문신인 미암 유희춘이 벼슬에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하네요. 이후 그의 후손인 안호가 곡성 동화 정원 아래에 있는 마을인 승법리에 도동사를 세웠고 호남의 학자들이 잇따라 찾아와 주자와 안향을 참배했다고 합니다. 1906년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장 기우만이 이곳에 은신하여 곡성 지사들과 의병을 모의하다가 발각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도동묘가 갖는 의미
도동묘는 안향을 기리는 공간으로서 최초로 설립된 서원인 소수서원 못지않은 상징성을 가진 곳입니다. 그것이 곡성 선비들에게 대단한 자긍심으로 작용하면서, 대한 제국의 의병운동,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과 남다른 교육열로 나타나며 작은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인재를 배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선비의 고장 곡성의 상징인 도동묘가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그 뜻을 널리 기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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