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명인] 뜨거운 불꽃 속 대장장이 ‘가치를 담아내는 일’

전통철기구 분야 유성배 명인의

‘아름다운 손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99-3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조상의 유무형 전통 예술문화의 유지 발전을 위해 가치 있는 인적자원 발굴·기록·인증·전승·유통을 촉진하고 동기를 부여해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현재 국내 명인 약 400명이 회원으로 등록됐고,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명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는 18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충청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을 인터뷰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들의 지난한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합니다.

▲ 유성배 충청 명인

정치적 억압과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 되었던 ‘유신헌법’이 1970년 10월에 발표됐습니다. 저는 그해 시월, 충남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 부흥부, 지금의 삼군본부가 있는 곳에서 3형제 중 막내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대장장이 아버지는 단순히 쇠를 두드리는 일이 아닌, 불꽃이 튀고 쇠가 울리는 소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신 장인이셨습니다. 당신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습니다.

불꽃이 일렁이는 우리 집 대장간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에 망치질로 리듬을 타시는 우리 아버지. 땀이 흐르는 당신의 손에 탄생한 물건들은 아버지의 자랑이자 인생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꿈과 희망을 담아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유성배 충청 명인

쇠를 다루는 일은 말 없는 아버지의 교육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대장간의 문턱을 수시로 넘었지만, 당시만 해도 어려서인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은, 아버지의 모습에는 대장장이로서의 자부심과 기술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알았던 것 같습니다.

뜨거운 불꽃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끊임없이 쇠를 다루는 일. 그것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삶의 가치와 정직함, 끈기의 중요성’을 아버지는 말없이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저희 3남매가 좀 더 자유로이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자율성을 중시하며, 스스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신 두 분이셨죠.

그렇지만 당신들의 손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아낌없는 조언과 지지를 보내주신 멋진 분들이셨습니다.

▲ 유성배 명인이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고 있는 모습이 화면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

늦깎이 주경야독...나도 드디어 ‘대졸’

그래서일까요. 큰형님은 현재 경남 삼청군 동의보감촌에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둘째 형님은 한때 첫째 형님과 함께 대장장이 일을 했으나, 현재는 스포츠 댄스 학원을 운영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대장장이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자율적 교육 덕분일까요. 저는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봐도 후회 없이 보낸 학창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찍 현역 군 복무를 마쳤고, 제대 후에는 쉬지 않고 자기 계발에 힘쓴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그 후, 건설사에 뛰어들면서, 배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습니다. 당시 직원들 학력을 볼 기회가 생겼는데, 중졸은 그냥 ‘중졸’이라고 쓰고, 고졸은 ‘고졸’, 전문대는 ‘전졸’, 좋은 대학이든 그렇지 않든 대졸은 딱 두 글자 ‘대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제 나이 24살, 한밭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선택은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대학생.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시간 맞춰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인의 애환이라고 해야 할까요. 흔들릴 때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오기’였습니다.

나름 즐겁게 마무리했던 대학 시절, 졸업이 제게 어떤 대우를 해주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누가 알아주기보다 저 스스로 ‘뿌듯함’이라고.

▲ 유성배 명인

가업을 이어받아 대장장이가 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회사 여직원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했고, 자식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선택이었죠. 부모님으로부터 이어받은 대장장이로 사는 삶 말입니다.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가족은 대를 이어 대장장이 일을 해왔습니다. 1대 할아버지, 2대 아버지, 3대인 저희 3형제, 그 뒤를 이어 이제는 4대 조카까지 내리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논산 연산대장간

어렸을 때부터 저희 3형제는 매일같이 대장간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지요.

늘 가까이에서 아버지가 만든 물건에 상표를 붙이고, 상자에 담으며 용돈을 받았곤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런 일련의 일들은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실, 처음에는 저희 3형제 모두 대장장이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대장장이로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재미있으며, 대단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대장장이 아닌 제 사업을 했었던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랄까요.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대장간에 들러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함마질(망치질)을 도와드리며 일을 배웠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순간, 연세가 드셔 점점 힘들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갈등이 오게 됐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이 일을 이어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습니다.

제가 하던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대장일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심은 단순한 직업 선택이 아니라,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계속해나가는 중요한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