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전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1코스ㅣ유서 깊은 연안 고을, 기장의 행정과 관방 유적을 톺아보다
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첫 번째 코스로
"유서 깊은 연안 고을, 기장의 행정과 관방 유적을 톺아보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1 코스 |
기장옛길 ▶ 기장읍성과 동헌 ▶ 기장향교 ▶ 기장고읍성 ▶ 두모포진 남산 봉수대 ▶ 임랑포 봉수대 ▶ 대변리주사창 |
기장군은 늦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던 고장이며, 삼국시대에 ‘갑화량곡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역사상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고장인데요.
바다를 끼고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는 관방의 요충지였던 기장을 톺아봐요.
코스 1ㅣ유서 깊은 연안 고을,
기장의 행정과 관방 유적을 톺아보다
기장옛길을 따라
기장읍성으로
기장옛길을 찾아서 |
동래는 전근대시기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이었고, 역사적으로 기장과 동래는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선사시대부터 긴밀하게 문화를 공유하였고,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에는 변한-가야 문화권에 속하였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라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동래에서 기장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살펴보면, 석대와 반송을 지나 안평-고촌, 만화리-교리를 거쳐서 기장 읍내로 들어간다. 이 길은 ‘반송로’라고 명명되어 있으며, 부산 시내와 기장 지역을 이어주는 핵심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길은 국도 14호선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동래와 기장 사이를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조선시기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잘 닦인 국도는 없었지만 석대와 반송을 지나 기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체로 비슷했다. 지금 도로를 따라 반송을 지나가다 보면 도시철도 4호선의 종점인 안평역을 만나게 되는데, 조선 시기에는 안평 지역에 신명역이 있었다. 이 역을 지나 기장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쌍다리재’라는 지명이 전한다.
이 길은 현재 ‘철마로’라고 도로명이 붙어 있다. 갈치고개를 넘으면 드디어 안평저수지를 지나 쌍다리재가 나온다. 쌍다리재는 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쌍다리재에서 기장옛길 입구로 들어가는 길은 대중교통인 버스 기준으로 크게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만화리영락동산 정류장에서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기술센터 정류장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동부농원 식당 간판이 나오는데 게이트 앞에서 보면 오른쪽으로는 식당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길이 이어져 있는데,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 길로 들어가면 머잖아 서부천 계곡(용소골)이 시작되고,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리고 ‘기장옛길’ 표지판이 나타난다.
기장옛길 표지판 부근에는 용소골 마애석각을 알리는 표지판도 서 있다. 이 석각은 계곡을 따라 암벽 혹은 바위 표면에 글씨를 새긴 것인데, 총 일곱명의 지방관에 대한 송덕비(공덕비, 선정비라고도 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길이 고을 입구[洞口]에 해당하므로, 하천 좌우의 바위에 글씨를 새겨 원님들의 송덕비를 대신하려고 한 것이다.
기장읍성 남문과 권은해 생가 |
기장읍성 근처 아파트 단지 옆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대형마트가 보이는데, 대형마트를 지나면서부터는 조선 시기의 기장읍성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려 시기까지는 기장읍성이 교리에 있었는데, 고려 말 우왕 때에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소실되면서 1391년(공양왕 3)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트를 지나 차성서로를 따라 내려가다 주공아파트 맞은편 쪽에 복원 중인 읍성의 서쪽 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계단을 통해 축대 아래로 내려가면 읍성 남쪽 구간과 남문, 그리고 남문 옹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장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읍성은 남문이 정문 구실을 하는데, 과거에는 위에 누각을 세운 형태였을 것이다.
또한 남문 앞에는 옹성이 호를 그리며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는 남문을 통해 들어는 적을 방비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 가옥은 2021년 부산광역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된 건물로, 1937년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건물의 명칭은 그저 ‘동부리 194-2번지 가옥’이다. 과거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에 원래 건물 이름이 없다면 그 건물에서 난 유명한 인물의 생가라고 이름을 붙이곤 했다.
권은해는 기장지역을 대표하는 여성 항일운동가였으나, 일가가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관계로 항일운동가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가옥에 당당하게 ‘권은해 생가’라고 명칭을 붙이지 못한 이유도 아마 ‘빨갱이 집안’에 대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좌익 계열 항일운동가들이 재평가를 받는 추세이고, 건물 역시 더 이상 개인 소유가 아니기도 하니, 권은해를 기장의 항일운동가로서 복권시켜
주는 동시에 이 건물에도 정당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장 장관청과 동헌 |
장관청은 기장현의 속오군을 통솔하기 위해 부임한 군관들의 집무 공간이며, 1835년에 지어졌다. 속오군은 조선 후기에 편성한 지방군을 말한다.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보명학교·명정의숙의 학사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시멘트로 보수된 허름한 모습을 띠고 있었으나, 2014년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 장관청 건물뿐 아니라 주변 경관 역시 정비하여 담장이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맞배지붕 형태의 대문도 당당히 서있다. 기장 동헌과 부속건물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장관청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청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인방과 기장 공덕비군 |
이것은 과거 이곳에 읍성의 성벽이 있었던 공간임을 드러내기 위해 세운 것으로, 현재는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 비석들은 원래 지금처럼 한곳에 모여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읍성 주변에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1972년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던 공태도 선생이 주도하여 기장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모아두었다가 2004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이 비석군은 대부분 지방행정과 관련된 인물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관찰사공덕비 7기, 수군절도사 공덕비 1기, 어사공덕비 1기, 현감공덕비 14기, 군수공덕비 5기, 지방아전공덕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개축 및 중축에 관한 비 2기, 기타 3기 등 총36기이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
기장향교와
고읍성
학문과 자치의 공간, 기장향교 |
기장 공덕비군 축대 아래로 계단을 타고 내려와 향교로 향한다. 북쪽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교차로가 나오는데, 큰길을 건너면 이곳이 교리이다. 이 마을에 향교가 있기 때문에 ‘교리(里)’라는 지명이 붙은 것이다.
향교는 조선 시기에 만들어진 지방 국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즉, 현재로 보자면 지방국립대학 정도 위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주요 고을에 향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이 건국된 이후 지방에 유학을 장려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전국에 향교를 건립하였다.
부산 지역에는 동래향교와 기장향교 두 곳이 건립되었다. 동래향교의 경우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기장향교는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된다.
향교는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방 내의 정치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지방의 양반들은 지역의 지배계급이자 유지로서 지방자치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향안 등의 목록을 만들어 다른 신분과 양반을 구별하였다. 향교는 고을 양반들의 집결지로서, 유학을 향유하고 함께 제사를 올리면서 서로 간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향교와 사립학교인 서원은 지방의 여론이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기장 옛터, 고읍성과 서낭당 |
고읍성은 혹은 고현성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부터 고려 우왕 대까지 기장의 읍성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당시 읍성은 조선 시기의 읍성처럼 고을을 감싸는 나성 형태가 아니고 고을 뒷산에 위치하여 위급 시 피란하여 농성하기 위한 형태로 되어 있다. 발굴성과에 따르면 돌로 기단을 쌓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해동지도』를 보면 읍성과 향교 사이에 ‘성황단(城隍壇)’이 그려져 있다. 기장 성황당이다.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성을 수호하는 신인 성황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고려 문종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설치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점차 민간화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보통 사당 외에 돌무더기와 신목(神木)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어쩌면 고려 시기에 고읍성 주변에 성황당이 건립되었고, 조선 시기에는 읍성이 이동하였으나 성황당은 제자리에 머물러 변치 않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이어 나갔던 것이 아닐까?
죽성리에 있는
임진왜란의 흔적들
조선 전기 기장 해방(海防)의 중심, 두모포진 |
두모포진은 현재 죽성리, 죽성천 하구에 위치한 조선 시기 수군진의 이름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기장 읍내에서 6번 마을버스를 타고 원죽1구(죽성초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원죽1리 마을회관 근처에 두모포진의 터가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순식간에 부산진과 동래부가 함락되었다. 두모포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인 1594년(선조 27) 3월 10일자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서생포·임랑포·두모포·기장·동래 지역의 성황당·수영·부산포와 양산 지방의 구법곡에 왜군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거였을 것이다.
경상좌수영 역시 바다가 아니라 수영강 하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두모포진성 유적은 지금은 풀밭이 되어 있지만, 제법 널찍하게 터가 닦여 있어서 사료에 나온 규모의 성곽이 세워지고 하천변에는 선소가 존재했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후술한 대변리의 주사창 역시 두모포진에 소속된 선박이 정박하는 시설로 활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군, 죽성리에 왜성을 쌓다 |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은 두모포에 주둔하면서 죽성리왜성을 쌓았다. 왜성은 일본군이 쌓은 성을 말하는데, 일본의 성곽축조 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죽성리왜성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당시 사정에 대해서는 1595년(선조 28) 12월 3일의 『선조실록』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왜성을 쌓는 석재를 근처의 암석만으로 충당할 수 없어서 교리에 있는 고현성(즉 고읍성) 터에 있는 돌을 이용해 왜성을 지었던 것이다. 기존의 자료들을 보면 기장읍성이나 두모포성의 석재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는데, 고읍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현재 왜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정비가 되어 있으나, 왜성이 문화재 내지는 사적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이에 사유지가 되었고, 경작지가 들어서서 본래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남산 봉수대에 오르다 |
죽성리에는 관방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대표적인 유적이 있는데, 바로 봉대산에 있는 남산 봉수대이다. 남산 봉수대는 죽성리와 대변리 사이에 위치하는데 죽성리에서는 왜성의 서편으로 난 등산길을 따라 산을 올라야 도착할 수 있으며, 대략 200m 남짓의 높이에 위치한다.
봉수대는 봉수(烽燧)라는 통신 체계를 구성하는 시설이다. 봉수는 빛을 활용한 전근대의 통신수단으로, 주로 국가의 비상 연락망으로 활용되었다. 변경에서부터 수도까지 주요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놓고 서로 연락망을 설정한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여 봉수대에 불을 피우면, 이어지는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보고 다음 봉수대로 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자세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수도까지 소식이 전달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고대부터 국가적으로 봉수 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해왔던 것이다.
임랑포 주변의
관방 유적들
임랑포 봉수대와 아이 봉수대 |
남산 봉수대의 신호를 전달받는 임랑포 봉수대는 좌광천 하구 근처의 낮은 산 위에 위치한다. 좌광천은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정관읍을 관통하고, 장안읍 임랑리를 통해 동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이다. 임랑포 봉수대는 현재는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울산의 영역이었다.
다만 교통 면에서 접근하기가 불편하고 주변이 정비되지 않아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고 숲이 우거져서 남산 봉수대와 같이 바닷가를 따라 펼쳐진 주변 풍경을 조망하기는 힘든 편이다. 기장에 또 하나의 봉수대는 아이 봉수대(혹은 아이포 봉수대)이다. 이곳은 현재 고리원자력발전소 영역 내에 들어가 있어서 직접 답사는 불가능하다.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지면서 그 경내에 위치하여 특별한 허가가 없는 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기껏 원래의 이름과 형상을 되찾았지만, 이 봉수대가 일반에 공개되는 날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만 더한다.
임랑포왜성의 입지 |
임랑포왜성은 임랑해수욕장 뒤편에 있는 방모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1593년 일본측의 모리 가쓰노부[毛利勝信]가 이끄는 병력이 지어서 거성으로 활용하였다. 자료에 따라서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었다고도 하는데, 가쓰노부와 요시나리는 동일 인물이다. 임랑포왜성은 방모산에서 좌광천을 바라보고 성곽을 쌓았고 그 아래 평지에는 거주 구역이 있었다.
성곽은 산 정상에 위치하는데 산의 높이도 낮고 성의 규모도 크지 않다. 산 주변에 일부 성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거주 구역이 있었던 곳은 2001년 신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로 실향하게 된 효암리 주민들을 위한 이주민 마을을 지으면서 발굴조사가 된 바 있고, 현재는 그 흔적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해창과
주사창
문동리 해창과 대변리의 주사창 |
조선 시기에 문동리는 기장을 대표하는 아홉 개의 포구 중의 하나인 독이포(禿伊浦)가 있었던 곳이며, 또 해창(海倉)이 있었다. ‘해창’은 말 그대로 ‘바닷가에 있는 창고’이다. 조곡(租穀), 즉 조세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저장하는 창고를 뜻한다.
기장의 해창은 왜관에 지급하는 쌀, 즉 공작미를 운반하고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고이다. 한양으로 올려보내지[上納] 않고 아래로 보낸다고 하여 공작미를 하납미라고도 부르며, 하납미를 실어 나르는 배를 하납선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옛 해창의 흔적도, 버릿개의 자갈밭도 찾을 수가 없다.
주사창은 기장읍 대변리에 위치했던 곳이다. 현재 수협 대변지점 건물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그 뒤편 언덕에 주사대라는 지명이 전하고 있다. 주사창의 ‘주사’는 수군을 뜻하는 말이며, 주사창은 전선, 즉 군함을 정박시키는 곳이었다.
대변리의 주사창은 이웃한 죽성리의 수군진영인 두모포영 소속의 배를 정박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생각된다.
- #부산역사
- #부산물길역사
- #부산물길역사발자취
- #부산물길역사의발자취를찾아서
- #기장
- #기장행정
- #기장관방
- #기장유적
- #기장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