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시간 전
송악읍 평생학습센터 특성화 프로그램;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
송악읍 평생학습센터 특성화 프로그램;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
송악읍 평생학습센터에서는 지역주민의 수요와 특성에 맞춘 맞춤형 교육, 특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송악읍 평생학습센터에서는 특성화 프로그램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를 기획해 수강생을 모집했는데요.
오늘은 당진 지역의 대표적 문학 유산 필경사와 심훈 선생을 주제로 인문·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필경사를 방문했습니다.
프로그램은 총 5회기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송악읍 평생학습센터 김민정 매니저는 "지역의 문화자원인 필경사 활성화를 위해 송악읍 맞춤형 프로그램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를 기획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당진의 많은 시민들이 지역 문학 유산인 필경사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심훈의 시 세계를 직접 느끼며, 인문·문화적 소양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라며
"수강생들 모두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 프로그램을 마칠 즈음엔 심훈 선생의 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성 및 지성 함양은 물론, 지역 문화 감수성을 향상하므로 지역주민들과 심훈의 문학정신으로 활발한 소통이 이뤄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필경사 상록수 문화관 체험교실에서 임정숙 시낭송가가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낭송하며 첫 수업의 포문을 활짝 열었어요. 수강생들을 임정숙 강사가 낭송하는 심훈의 시를 들으며 시향기 속에 흠뻑 빠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송악읍에는 필경사가 있는데요. 심훈 선생님과 관련된 특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심훈 선생님의 시를 함께 낭독하고, 필사할 수 있는 강의를 요청합니다.
임정숙 강사는 우연히 심훈 선생의 시를 낭송한 것을 계기로 심훈의 시에 매료되어 즐겨 낭송했다고 해요. 어느 날 송악읍 평생학습센터 담당자의 제안으로 심훈 선생 관련 수업을 부탁한다는 전화를 받고 너무 기뻐 흔쾌히 수락했다고 합니다.
임정숙 강사는 "오늘 첫 회기에는 심훈 선생의 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필경사 일대 투어를 하는데요. 주최 측에서 심훈 문학 기념관에서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록수의 산실인 필경사 내부를 관람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또한, '직녀성'과 '영원의 미소'를 집필한 곳이자, '상록수' 소설의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이 된 심재영 선생 고택도 방문할 수 있도록 힘써 주셨습니다"라며
"송악읍 특성화 프로그램 '필경사, 심훈 시(詩) 향기에 취하다'를 통해서 수강생들이 심훈 선생의 시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현재 우리가 심훈 선생이 살았던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의 작품 속에 담긴 나라 사랑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수강생들 모두 심훈 선생의 시를 낭독하면서 한 번, 필사를 하면서 한 번 더, 그 시대의 정신을 새겨보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낭독과 필사 활동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송악읍 평생학습센터 관계자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심훈의 시향기에 흠뻑 취해 이동한 곳은 심훈 기념관이에요. 김현자 문화 관광 해설사와 함께 심훈 관련 영상을 시청한 후 심훈의 예술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김현자 해설사가 심훈 선생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해 줬어요. 심훈(沈熏, 본명 심대섭)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민족 계몽을 위해 문학, 언론,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대표적 지성인이자 독립투사였다고 합니다.
심훈 선생은 1901년 서울 노량진(현 동작구 흑석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8개월간의 투옥과 퇴학을 겪었다고 해요. 옥중에서 비밀리에 부쳐진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은 심훈의 작품 중 최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옥중에서 쓴 이 글은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잘 표현해 큰 감동을 줬다고 해요. 심훈 선생이 투옥되었던 감옥을 재현한 공간에서 수강생들이 감옥체험도 했습니다.
10여 명이 수강생들이 감옥체험을 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쳤는데요. 손을 자유롭게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공간이 비좁았습니다. 심훈 선생이 투옥되었을 당시에는 이 작은 공간에 18명이 수감되었었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는지 짐작이 가네요.
출소 후 중국으로 건너간 심훈은 이회영, 신채호, 이동녕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인을 위로해 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심훈은 기자로서 일제의 만행을 밝히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는데요. 1926년 순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통곡 속에서'를 발표했고, 1927년에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감독과 주연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과 장편소설 '불사조'를 집필하며 저항 작품을 계속 써나가자, 일제는 심훈을 철저하게 감시했는데요. 결국, 심훈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으나 일제에 대한 저항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35년 소설 '상록수'를 발표하고, 1936년에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에 감격해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 일제에 저항하는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는데요.
그러나 1936년 안타깝게도 장티푸스에 걸린 심훈은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나 그의 문학과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훈기념관에는 심훈 선생의 삶과 문학,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주요 전시 품목은 심훈이 직접 사용했던 물품과 수집한 엽서, 심훈의 시, 소설, 산문, 영화 등 문학 및 예술 활동과 관련된 원고, 초판본 관련 자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심훈 관련 사진 및 기록물 등 심훈가 후손 및 관계자들이 기증·위탁한 유품 200여 점, 유물 5,000여 점이 전시실과 수장고에 보관·전시되어 있다고 해요.
심훈 기념관에서 필경사로 이동해 내부를 관람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아이들과 필경사를 가끔씩 찾곤 하지만 이렇게 필경사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요.
오늘은 특별히 수강생들을 위해 개방했다고 합니다. 필경사는 1934년 심훈이 직접 설계해 지은 집으로, 전통 초가집 외관에 1930년대 도시주택의 실용성을 반영한 구조가 특징인데요.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 단독 초가집으로 전통 초가집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내부는 생활에 편리하도록 꾸몄다고 합니다.
호고유시수단갈 연경누일파음시(好古有時搜斷碣 硏經屢日罷吟詩)
옛것이 좋아 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고, 경전연구로 여러날 시를 읊지 못하네
추사 김정희-대련
심훈 선생이 집필을 했던 방에 누군가 기증한 멋진 족자가 걸려 있네요. 추사 김정희 선생은 지인들에게 나는 이래서 요즘에는 시를 많이 읽지를 못했다고 표현할 때 이 구절을 써서 보낸다고 합니다.
필경사 안에는 심훈이 사용했던 책, 등잔, 이불, 부엌살림 등이 재현되어 있었는데요.
어릴 적 살던 초가집 부엌이 맨 가에 쪽에 있었던 것과 달리 필경사에는 부엌이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군불을 지피던 아궁이도 보이고, 부엌 위층으로는 다락방이 있어 부엌살림이나 이불을 보관하고 때로 손님이 오면 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왼쪽 맨 가 쪽으로는 군불을 지펴 물을 데울 후 있는 욕조도 있고, 맞은편엔 화장실도 있어 생활 속 편의 시설을 효율적으로 설계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필경사 관람 후 심재영 고택으로 향했습니다. 입구에는 멋진 솔밭이 조성되어 있어 심재영 고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맑아지네요. 입구에는 '나의 강산이여'를 새긴 시비와 사자상 두 개가 보입니다.
이 사자상은 나라와 농촌을 위하여 으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외조부 심재영 옹을 추모하며, 외조부의 같은 피를 이어받은 더 많은 인재들이 이 터전을 거쳐 배출되기를 기원하며 윤상진 작가가 봉헌했다고 해요.
1. 아산만과 송악산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漢谷) 만세!
2.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3.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지 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자!
(후렴) 비바람은 험궂다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 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심훈-애향가
솔밭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넓은 벌판 앞에 '애향가'를 새긴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가사가 친숙한 느낌인데, 이 노래는 당시 애국가 곡조에 맞춰 불렀다고 하네요.
당시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에 맞춰서 불렀는데 일제는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심훈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애국가 곡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애국가 형식으로 애향 가를지어 주었다고 하네요.
심훈의 맏조카인 심재영은 19살인 1930년에 당진에 내려와 농토의 관리사에서 기거하며 1931년에 집을 짓고 정착해 살았습니다. 1931년 심훈의 부모가 먼저 낙향하여 살았으며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한 심훈이 필경사를 지을 때까지 거처했던 곳인데요.
솔밭 너머엔 드넓은 벌판이 이어지고, 위쪽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근대식 기와집 심재영 고택이 있습니다.
고택 앞에는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 심재영 동상이 세워져 있네요. 심재영 선생은 경성 농업을 졸업하고 낙향해 야학당을 만들고, 동네 청년 16인과 공동경작회를 시작해 낙후된 농촌의 발전에 젊음을 바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입니다.
심재영 선생은 이곳에서 1995년 소천하실 때까지 평생을 사셨다고 합니다.
심재영 고택은 현재 아들인 심천보 선생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는데요. 심천보 선생은 1940년에 이곳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살다가 고향을 지켜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15년 전에 귀향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훈선생·심재영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네요.
심천보 선생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심훈 선생의 삶과 문학, 그리고 심재영 선생의 농촌계몽 사상을 수강생들에게 설파했는데요.
심천보 선생은 심훈의 '그날이 오면', '상록수'가 유명한 시와 소설이라는 건 알았지만 한국 정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40이 넘은 어느 날, 신문을 통해 100년 동안 한국 정신문화를 제일 많이 선양한 소설이 상록수라는 사실을 접했다고 해요. 선생은 그러구러 살다가 한국일보에서 봤던 기사가 계속 생각이 나 귀향해 심훈기념사업회 이사장을 하며 심훈 선생의 문학정신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심천보 선생에게 심훈·심재영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심천보 선생이 수강생들에게 심훈의 '그날이 오면' 시집을 선물해 줘서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고택도 둘러보았습니다.
위 사진은 '청련시경' 인데요. '청련 시경'은 심훈 선생의 증조부인 심의붕 선생이 김정희 선생과 교류하여 얻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훈가(家)에서 170년간 소장하다가 종손 심천보 선생이 2019년 5월 10일 예산군에 기증했는데요. '청련시경'은 김정희가 만년에 직접 쓴 글씨로 글자는 양각으로 새겨져 제작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련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호를 의미하고 시경은 시를 지을 만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장소를 가리키는데요. 이처럼 청련과 시경이 결합되어 이백이 시를 지을만한 뛰어난 장소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50호 해초 박학규 선생이 각(刻)한 현판으로 예산군에서 기증했다고 하네요.
심재영 고택 뒤편 송림 사이에 상록수 교회가 보입니다. 상록수 교회는 심훈 선생의 형 심명섭 목사가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게 납북을 당한 후 향리에 내려온 부인 권유희 권사와 심훈가 가족 중심으로 소수의 피난민과 지역주민이 참여하여 1951년 9월 23일 필경사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21년간 필경사를 교회당으로 사용하여 예배를 드린 후 2차 교회당을 거쳐 2001년 4월 16일 지금의 자리에 3차 교회당으로 신축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심훈 선생의 이모 윤병영 전도사가 초대와 제8대 담임 교역자로 사역했고 부곡교회로 설립되었다 2007년에 심훈 선생의 농촌계몽운동을 신앙적 계몽운동으로 이어가려는 뜻을 담아 당진 상록수 교회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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