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독립기념관을 가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1


독립기념관은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몇 번 가봤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제 한번 갈 때가 된 것 같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함께 연휴 때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가서 자주와 독립의 정신으로 지켜온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역사를 한번 만나 봐야지~!!

▲ 겨레의탑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게 겨레의 탑이다.

겨레의 탑은 영원 불멸의 민족 기상을 표현하고 민족의 자주와 자립을 향한 의지를 담고 있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양 탑 사이에는 무궁화 형상이 있고 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 겨레의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컬처 박람회 표시 조형물이 꽃과 함께 장식 되어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겨레의 집 가기 전에 양 옆으로 많은 태극기가 있다.

이날은 바람이 별로 없어서 흔들림이 별로 없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태극기의 휘날림을 볼 때 애국심이 막 타오른다.

영이는 그렇다.ㅎ

태극기가 모여있는 곳은 태극기 한마당이라 이름 붙여져 있다.

민족의 독립 정신과 자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광복 60주년 해인 2005년에 조성되었다.

광복을 상징하는 815기의 태극기가 겨레의 집을 감싸는 형태로 게양 되어 있다.

태극기 815기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다.

하지만 잊어버릴 수 없는 숫자라 기억하기 좋다.

독립기념관 현판이 걸린 기와집으로 지어진 겨레의 집은 볼 때마다 그 크기에 압도 당한다.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 대표 상징 건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든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라고 한다.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 겨레의집에서 본 풍경

▲ 서명문 태극기

겨레의 집에 올라가서 걸어온 길을 돌아서 내려다보니 가슴이 뻥 뚫린다.

가까이에서는 높게만 보이던 겨레의 탑이 작아졌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들, 태극기들, 사람들, 뭔가 가슴 벅차다.

겨레의 집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걸려있다.

광복 직후 한국광복군 제3지대 2구대 대원들이 조국의 완전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 등을 남긴 태극기라고 한다.

이 태극기는 국가등록유산이라고 한다.

겨레의 집 뒤로 가면 6개의 상설전시관과 특별기획 전시실이 있다.

특별기획 전시실은 공사 중이었다.

이번에 6관 까지 둘러볼 수 있다.

▲ 고인돌

▲ 무용총 벽화

▲ 거북선

1관 겨레의 뿌리

선사시대 이래 조선 시대 후기인 1860년 이전까지 민족사의 뿌리와 전통문화,

그리고 불굴의 민족혼과 국난 극복의 노력에 관계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1관에서는 우리가 한국사 책 앞 부분에서 많이 접한 친숙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인돌, 무용총, 거북선 등이 그것이다.

비교적 가볍게 볼 수 있는 곳이다.

▲ 을사늑약

▲ 일본군 위안보 동원

제 2관 겨레의 시련

근대적인 자주 독립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좌절된 후 이어진 일제의 식민 지배 실상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도 계속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2관을 둘러보면 을사늑약을 비롯하여 화가 나는 부분들이 몇 있다.

국제법적 절차와 형식이 갖춰지지 않은 채 일제의 무력과 협박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 당했다.

을사늑약의 체결한 가담한 5명의 주요 친일 인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 다섯명 을사5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다.

저 이름들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나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왜 우리는 저 이름들을 기억해야 할까?

그것은 나쁜 역사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말한 한국사 유명 강사님이 자주 하던 말이 내 머리 속에 맴돈다.

▲ 3.1운동

▲ 민족지도자 48인

제 3관 겨레의 함성

3.1 운동과 대중 투쟁에 참여했던 민중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느껴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3관은 3.1운동 관련 자료들이 많이 전시 되어 있었다.

조형물들이지만 3.1 운동의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1관에서 3관까지 둘러보는데도 시간과 체력이 꽤 많이 소모되었다.

제 4관은 평화 누리, 제 5관은 나라 되찾기, 제 6관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전시관이다.

오늘 다 못 둘러본 곳의 리포트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방문해 이어서 써야겠다.

▲ 영웅들

밖에 나오니 세 명의 독립 투사들의 동상이 정말 늠늠하게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위의 분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자.

윤봉길(1908~1932)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밝혀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일본군의 상하이 전투 승리와 일본

천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계획의 실행을 부탁하였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되고 있는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단상

위에 있었던 일제의 군부와 정계 요인 7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1932영 12월 19일 일본의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안중근(1879~1910)

안중근은 1907년 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

부대를 이끌었던 안중근은 1909년 뜻이 맞는 동지 12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기회를 기다렸다.

안중근은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그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권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김좌진(1889~1930)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은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만주로 파견

하였다. 당시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이었던 김좌진은 군대를 청산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청산리 부근에서 약 10여 차례 벌어진 전투는 독립군의 압도적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김좌진은 독립군을 규합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중국 하이린의 정미소에서 한인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저격으로 순국하였다.

위의 세 분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독립군도 있지만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수많은 이름 모를 애국 지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종종 독립기념관에 들러서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정신을 마음에 새겨야겠다.

천안 독립기념관

○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 전화: 041-560-0114

○ 관람료: 무료

○ 휴관: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개관)

○ 시간: 하절기(3월~10월) 09:30~18:00

동절기(11월~2월) 09:30~17:00

* 방문날짜: 2024. 09.17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영이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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