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전
역사적, 문화적 장소인 금봉재
역사적, 문화적 장소인 금봉재
경남 고성은 경상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변한시대에 고자미동국 또는 고사포국이었습니다.
서기전 2세기경까지 독립된 세력으로 존속하고 있던 소집단들이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발달된 정치권력에 의해 단일정치집단으로 통합된 것이 고자미동국입니다.
737년(신라 효성왕1)에 신라에 흡수되어 고자군으로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고성군으로 바뀌었습니다.
995년(고려 성종14)에 고주로 확장되었고 후에 철성부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현종0)에 고성현이 되었습니다.
1266년(세조3)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습니다.
1604년(선조 37) 거제현으로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로 이전하였다가
두룡포가 1617년(광해군 9) 고성현으로 이관되었습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로 소속되었습니다.
그리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엇습니다.
그리고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지금은 고성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깊이가 있는 고장인 경남 고성군의 회화면 봉동리 웅곡에 자리잡고 있는 조상의 얼이 담긴 유적이 있습니다.
고성지방 사림들이 고성이씨의 선조인 행촌공 휘 함과 관포 어득강 선생을 배향하고 강학하며 제향을 모시던 곳인 금봉서원이 있었고,
임진왜란의 병화로 서원 모두가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상량문만 전해져 오던것을 이후 금봉재로 재건하게 됩니다.
금봉서원의 상량문에는 아래과 같은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중의 현인이 돌아가시면 사묘(社廟)에서 제사하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읍자 (邑子, 읍내에 사는 유생)가 향현(鄕賢)을 사모하여 사원(祠院, 사당과 서원)을 세우려 하지 않으리요. 이와 같은 광세(曠世, 세상에 드뭄)의 거사(擧事)는 한 고을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행촌(杏村), 관포(灌圃) 두 선생은 고생에서 이어서 출생하고 동남의 기백을 타고난 명현(名賢)으로
그 문장과 사업의 성취는 다 국사에 실려있습니다.
행촌 선생은 고려에서 그 명성이 높이 드러났고 탁월하고 아름다운 행적은 세인에게 널리 전파 되었습니다.
또 관포 선생은 조선 중기의 어진 선비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그 이름을 드러내더니
세란(世亂)중에 용퇴함으로써 백대의 휘영(煇映, 밝게 비침)을 이루었다 알려졌습니다.
고성군의 동쪽 금봉산 웅곡(熊谷, 곰실)의 경치 좋은 곳에 선조이신 6世 文山公 휘 진(瑨)과 8世 文憲公 휘 우(瑀)의
내외분 묘소에 세향을 받들던 곳으로 산 이름에 따라 봉산재라 하였습니다.
봉산재는 건립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0년(1684)에 후손 휘 하상(夏相)께서 文山公, 文憲公의 묘소를 찾아 묘역을
사초(沙草)하고 묘비를 세운 기록으로 보아 이 이후에 창건하여 세향을 받들어 오다가 1932년 크게 증수(重修)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봉산재에서 금봉재로 불리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금봉재는 시조 및 5세위의 단향과 6世 文山公, 8世 文憲公의 묘향을 받드는 고성이씨의 재실로 그 동안 사용해온 금봉재의 이름을
1987년 11월 20일 대종회에서 봉산재로 개칭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오랜동안의 관습 때문에 1991년부터 자연적으로
金鳳齋로 다시 불리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이 묘소의 오른 쪽 산기늙에 있던 금봉서원(金鳳書院)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자 이 서원에 모셔졌던
행촌공의 위패를 봉산재(鳳山齋)에 옮겼으나 금봉서원이란 내력 때문에 금봉재로 불리어 옵니다.
서기 1932년에 중수한 금봉재는 수백여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수차례 중수 하였으나 비바람에 씻기어 낡아
비가 새고 헐어서 무너질 상태에 이르렀고 본재만으로 해마다 늘어나는 참제원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1980년 음력 10월 5일 대전 유호재에서 재종회 총회시에 고성 유허지 성역화와 금봉재 재건, 시조이하 5세위 설단등을 추진하자는
종의를 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위선사업에 몇몇 종친이 솔선 거액을 표성함으로써 재건사업 주친에 큰 힘이되었습니다.
이후 고성이씨의 오랜 소원인 금봉재 재건사업이 시작되어 1983년 5월 10일 정오 금봉재 현지에서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1984년 4월 15일에 완공되었습니다.
금봉재 본채가 완공 후에 동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84년 11월 26일 동재를 완공하였습니다.
이후 현재에 이르면서 주차장과 관리실 등 다양한 편리 시설이 조성됩니다.
고성이씨 시조는 이황입니다. [이씨추원록]에 의하면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 이었던 이반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뒤 눌러 살게 되었는데 이황은 그 후손으로 24세손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려시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고려 덕종 때 문과급제 후 밀직부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오른 철령군 이황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이중 7대파는 이암의 손자이며,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던 용헌공 이원의 7형제를 각각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고성 이씨는 관향이 경남 고성이지만 고성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거주되어 살고 있으며 세거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거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많은 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세거지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사라지고 있는 추세 입니다.
철령군 이황은 고려 중기에서 후기에 활약하신 분인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관직에 들어가면서 정3품, 오늘날에 비유하면 장관급까지 이르신 분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문무를 겸했다고 알려졌으며 거란군을 퇴차한 경력이 있습니다.
참고로 고성 이씨 시조의 이황과 퇴계 이황은 동명이인 입니다.
금봉재는 외삼문과 본당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고성이씨 선조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고성이씨의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한옥의 건물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기도 합니다.
금봉재가 있는 웅곡은 곰실마을로 불리기도 합니다.
마을 주변의 산세가 곰의 형상을 닮아 "곰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웅곡(熊谷)"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곰을 뜻하는 "웅(熊)"과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마을의 자연적 특징을 반영하며, 마을 주민들에게도 자부심을 주는 요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곰실마을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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