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세 번째 코스로

"동백섬에서 기원한 해운대, 바닷길 따라 역사와 문화를 찾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3 코스

센텀시티 ▶ 간비오산 봉수대 ▶ 동백섬

▶ 해운대해수욕장 ▶ 구 동해남부선 해운대 역사

▶ 달맞이고개 ▶ 청사포 ▶ 송정해수욕장


해운대는 하나의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동백섬에 최치원이 다녀갔다는 '해운대 각석'과 그 주변의 암석해안이 그것인데요.

반면 행정구역 상 해운대는 북동쪽으로 장산, 남쪽으로는 남해, 서쪽으로는 수영강이 흐르는 대체로 삼각형 모양의 땅으로 이뤄진 공간입니다.


코스 3ㅣ동백섬에서 기원한 해운대,

바닷길 따라 역사와 문화를 찾다

수영강변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들

삼어마을과 재송포

반여동의 경우 마을 대부분이 장산 자락에 위치하지만 수영강 상류를 끼고 있다. 그중 반여 4동에 해당하는 ‘삼어마을’의 명칭은 수영강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삼어’라는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철에 따라 수영강을 거슬러 오는 황어·은어·연어를 이 지역에서 낚았기 때문에 ‘삼어 마을’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반여동 바로 하류에는 재송동이 있다. 재송동은 조선시대에 재송포가 있었던 곳으로, 이름을 풀이하면 ‘소나무를 기르는 포구’라는 뜻이 된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 동래현 산천 조에 “재송포는 현 동쪽 10리(약 3.93km)에 있으며 소나무 수만 그루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영비행장에서 센텀시티로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센텀시티 전경

센텀시티는 행정구역 상 재송 1동과 우 2동의 일부분이며, 수영 강변에 만들어진 신도시이다. 센텀시티 영역을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옛 수영비행장이 있었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과수원을 일구었고 1934년 골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태평양전쟁기인 1940년 이곳에 병참 수송을 위한 비행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노역을 징발당했다고 한다.

1944년 비행장이 완공되어 ‘육군비행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에 의해 ‘수영비행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국내선 항로가 개통되었으며, 1948년 민간항공 운송이 시작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은 임시수도가 되었고 수영비행장도 임시 국제공항으로 지정되며, 1954년까지 유엔공군 비행장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1994년부터 건설교통부 주도로 이곳을 ‘정보단지’로 개발할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고, 1997년 IMF 사태로 개발이 난항을 겪던 중 1998년 부산시로 개발이 이관되었고, 2000년에 사업 명칭도 ‘센텀시티’로 변경되었다.

이후 산업 단지·혁신 도시 외에도 주거지와 상업지, 공공시설과 공원 등이 포함된 개발이 진행되었고 2013년 준공하였다.

현재 센텀시티 내에는 대형 백화점과 대형마트, 쇼핑몰을 비롯한 다양한 상업시설을 포함한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다수의 공공기관과 컨퍼런스 공간인 벡스코(BEXCO), 방송국도 들어서 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과 마린시티

수영만요트경기장과 그 일대

마린시티는 수영만 매립 사업의 결과물이다. 수영비행장이 있던 시기의 옛 사진을 보면 수영강 하구에는 토사가 퇴적되어 이루어진 중도(中島)도 있었다. 비행장 바로 남쪽에 해안이 있고, 마린시티와 수영만 요트경기장 일대는 바다였다.

이 해변은 작은 해운대, 소운대라고 불리었지만 1983년 수영만 매립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이 사업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때 사용될 수영만 요트경기장 및 부대시설을 짓기 위해 추진된 것인데, 이때 매립으로 만들어진 땅을 ‘마린시티’라고 한다.

수영만요트경기장 주변의 빈 땅에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하나둘씩 형성되었다. 또 요트경기장 근처에는 올림픽 공원과 올림픽 동산이 들어섰다. 올림픽 이후에도 요트경기장은 요트 접안시설로 활용이 되고 있으며, 지금도 수십 대의 크고 작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요트경기장 내에 부산영상위원회나 시네마테크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현재는 ‘영화의전당’으로 모두 옮겨져 있다.

운촌마을 주변의

유적과 동백섬

간비오산 봉수대와 운촌항

간비오산 봉수대 화구

간비오산 봉수대가 있는 봉대산은 148m 정도의 높이고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필자의 걸음으로도 정상까지 고작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산 정상에 도착하면 봉수대 화구 위치에 화톳불을 피울 수 있을 만한 작은 화구가 만들어져 있고, 산 정상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땅에 박혀 있다. 주변 경관이 잘 보이는 위치이긴 한데 주변에 나무가 자라서 파노라마가 이어지지 않는다.

간비오산 봉수대는 ‘간비오 봉화’라고도 한다. 이를 통해 늦어도 세종 초에는 이미 황령산 봉수대와 남산 봉수대 사이의 간봉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 부산 지역의 봉수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봉수대를 찾을 수 있다.

운촌항은 동백섬이 파도를 막아주고 춘천의 담수와 염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천혜의 어장이었다. 1911년 편찬된 『한국수산지』에는 운촌에 대해 “수영만의 북동안에 위치한 (동래군) 동하면 내의 주요한 어촌 마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백섬과 최치원

동백섬에 있는 최치원 동상

동백섬은 예전에는 춘천 하구에 있는 섬이었을 텐데 지금은 입구가 매축되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해운대해수욕장이 개장한 이듬해인 1966년 동백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제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명물, 잘 정비된 산책로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며, 봄이면 벚꽃 명소로도 유명하다.

최치원은 보통 고운(孤雲)이라는 자(字)로 알려져 있으나, ‘해운(海雲)’이라는 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동백섬 남쪽 바위에는 ‘해운대’라고 새겨진 각석이 유명한데, 최치원 본인이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며, 여기서 ‘해운대’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치원 동상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왼쪽으로 작은 정자가 나오고, 앞으로 누리마루 전망대 풍경이 펼쳐진다. 예전에는 등대 전망대로 불렸던 곳이다. 전망대 옆에는 해운대 등대가 서 있고, 주변에 원형으로 널찍한 공간이 있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

가던 길을 조금 뒤로 돌려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 방문하였다. 누리마루는 2005년 11월에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 지도자 회의 장소로 지어진 곳이다. 건물 명칭 자체가 ‘세계 정상’이라는 뜻인 만큼 당시 21개국 정상이 이곳에 모여 회의를 열었고, 회의 이후에는 이 행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또 지금도 국제 행사 개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누리마루 건물이 들어설 당시에 동백섬 경관을 해친다는 우려가 많았는데, 지금은 동백섬의 명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해운대해수욕장 일대의

풍경이 바뀌다

해운대해수욕장과 옛 해운대역사

해운대해수욕장 전경

데크길을 따라 인어상을 지나면 예의 호텔 앞으로 나오고, 눈앞으로 끝없는 해운대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해운대해수욕장은 1965년 개장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백사장에서 학생들이 하계 단련을 하곤 하였다고 한다.

해수욕장 개장 직전인 5월 말에는 이곳 모래사장에서 모래축제를 개최하며, 해운대의 모래사장은 예전에는 매우 폭이 넓었으나 수영만 매립을 전후하여 하천과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면서 점차 좁아지게 되었다.

구남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옛 동해남부선 해운대 역사가 보인다. 이 건물은 중앙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승강장 공간이 펼쳐져 있다. 2016년 동해선 부전-일광 구간이 개통되면서 옛 동해남부선 역들은 폐역이 되고 선로 역시 그 쓸모를 잃게 되었다.

옛적 동해남부선은 부산진에서 포항에 이르는 철도로 해안 가까이 철로가 놓여서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또 부산 사람들이 해운대나 경주 등 유명 관광지로 갈 때 타는 피서 열차, 수학여행 열차로 각광을 받았으나, 동해남부선이 폐지되면서 역사는 문화공간으로 정비되었다. 역사 앞에는 ‘아틀리에 칙칙폭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해리단길 입구. 옛 해운대역사 뒤편에 있다.

옛 해운대 역사 옆으로는 해리단길 방면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해리단길은 철로 뒤편의 우 1동 마을에 있는 거리이다. 동해남부선이 폐지되면서 해운대 방문객들이 이 지역을 찾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해리단길’이라는 명칭은 서울 용산 ‘경리단길’에서 ‘~단길’을 따오는 게 유행이던 시절에 붙은 것이다.

그 입구에 구청에서 ‘함께 해리단길’이라는 글자 조형물을 세운 것을 보면 이 명칭이 거의 공식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역 특성을 무시한 명칭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입장이다.

해운대 신도시와 구석기 유적

해운대 구석기 유적지 비석

해운대 신도시(신시가지)는 중동의 북동부와 장산 자락에 위치한 좌동 지역에 형성된 신도시이다. 1980년대 도시지역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주택 200만 호 공급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부산 지역의 경우 40만 호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해운대 좌동을 중심으로 신도시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해운대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구석기 유적인 해운대 좌동·중동 유적이 발견되었다. 원래 이 지역에는 묘지나 경작지가 분포하고 있었다. 1992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부산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두 유적은 모두 후기 구석기의 유적으로, 석기를 제작한 흔적이 주로 발견될 뿐 주거·생활·장례 등에 관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좌동 유적에서는 모루 돌·망치 도로·몸돌·격지 등 석기를 만드는 도구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석영으로 만든 석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 규슈 지역과의 관련성이 제기되었다. 중동 유적은 좌동에서 발견되지 않는 좀돌날 도구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동 유적이 좌동 유적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해운대구청, 온천, 시장

해운대구는 일제강점기 부산부 수영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53년 해운대출장소가 독립했으며, 1976년 동래구를 거치지 않는 직할출장소가 되었고 1980년 드디어 해운대구로 독립하였다. 해운대구청 건물에는 구청 외에도 구의회가 입주해 있다. 해운대구는 2022년 현재 인구 40만으로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이며 해운대구청은 거대도시 해운대구 행정의 요람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구청 앞에는 해운대 온천이 있다. 이 온천 역시 원래 이름은 ‘구남 온천’이라고 했는데, 신라 하대의 진성여왕이 천연두를 앓았다가 여기서 온천을 하고 쾌차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온천의 존재가 거의 잊힌 상태였다가 개항기가 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온천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1934년 동해남부선이 해운대를 지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온천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1935년에 건립된 온천 여관에는 온천 풀장이 있어 유명했다. 해방 이후에도 해수욕장과 온천휴양지가 가까이 있다는 장점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1984년 새로운 탕원이 발견되기도 했다. 해운대 온천은 식염천으로 약간의 소금기를 머금고 있으며 수온은 45~63℃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구청 근처에는 해운대시장(혹은 해운대 전통시장)이 있다. 원래 이 일대 전체가 시장이었는데 현대식 상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구청 앞에서 구남로까지 200m 남짓한 외길만이 시장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구청 쪽과 구남로쪽 입구에는 ‘해운대 전통시장’이라고 적인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해가 갈수록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식당과 기념품 가게의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조금이나마 지역 기반의 전통시장다운 풍경이 남아 있다.

달맏이고개 넘어

송정 가는 길

달맞이고개와 해월정

달맞이고개의 해월정

일반적으로 이곳은 ‘달맞이언덕’ 혹은 ‘달맞이고개’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데 산자락은 ‘달맞이언덕’으로, 고갯길은 ‘달맞이고개’로 구분하여 표기하고자 한다. 달맞이언덕은 ‘와우산(􈍀牛山)’이라는 이름의 산자락에 해당하는 언덕이다. 와우산은 이름 그대로 산 모양이 소가 누운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청사포 뒷산에 해당한다.

달맞이고개는 달맞이언덕의 중턱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고갯길로, 해운대에서 달맞이고개로 넘어가면 청사포 입구를 지나 송정 방면으로 연결된다. 해운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달맞이동산’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1983년 조성된 곳이다. 거기서 바닷가 방면으로 높이 솟은 곳에 해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안내판을 보니 1997년 조성되었다고 한다.

해월정은 달맞이고개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아침에는 일출, 낮에는 바다, 밤에는 달구경을 할 수 있다.

청사포와 구덕포

청사포 망부송과 당집. 망부송은 청사포마을 수호신인 골매기할매의 슬픈 이야기와 관련 있다.

청사포는 말 그대로 ‘푸른 모래가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마을 이곳저곳을 보니 ‘푸른 모래의 마을’로 마을을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지금은 청사포 해안은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는데, 옛적에는 푸른 모래가 빛나는 모랫벌이 있었나 보다. 또 다른 유래로 원래는 ‘청사포’, 즉 ‘푸른 구렁이의 포구’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었다는 설도 전하고 있었다. 지명에 푸른 구렁이가 들어간 까닭은 마을 수호신인 골매기 할미에 얽힌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어부의 아내였던 김 씨는 바다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바다가 보이는 바위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였다. 그러기를 수십 년, 이를 애처롭게 여긴 용왕이 푸른 구렁이를 보내 김 씨를 용궁에 데려와 남편과 상봉시켰다고 한다. 이후 마을에서 골매기할매로 추앙을 받게 되었고 김씨가 심은 나무는 ‘망부송’ 나무가 자라는 바위는 ‘망부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망부송의 수령은 35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청사포와 구덕포 사이에 있는 다릿돌전망대

청사포에서 그린레일웨이 해안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구덕포가 나온다. 그런데 청사포에서 구덕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중간쯤에 바다를 향해 다리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사포와 구덕포와 경계 지점은 ‘고두말’ 혹은 ‘고두백’이라고 하는데, 이 근처는 기암괴석이 해안을 형성하고 있어 그 풍경이 장관이다. 고두말 근처에는 다섯 개의 암초가 나란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징검다리’라는 뜻으로 ‘다릿돌’이라고 불렀다.

송정해수욕장과 죽도공원

송정해수욕장 전경. 1935년 7월에 개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정해수욕장은 구덕포와 죽도 사이에 형성된 모래사장에 만들어진 해수욕장이다. 모래사장을 따라 민박집이 줄을 지어 있었고, 잡다한 기념품 가게나 조촐한 식당도 있었다. 펜션이라는 말이 일반화되기 전의 일이다.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이곳에 MT를 많이 온 것은 송정해수욕장이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기 때문이다.

해운대나 광안리, 송도, 다대포 등 부산 지역의 여타 해수욕장에 비해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사람이 덜 붐비고, 숙박비 등도 비교적 저렴했던 것이다.

죽도공원은 송정해수욕장 북동쪽 끝에 위치한 섬인데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섬 중턱에 난 산책로를 한 바퀴 돌 수 있고, 산책로 한쪽 끝에는 송일정(松日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송정, 특히 죽도공원 일대는 풍경이 좋아 데이트 코스로 유명했고, 멀리 신혼여행을 가지 않던 시절에는 여기서 신혼여행 사진을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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