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시간 전
과거 창원의 중심지 창원읍성 흔적 찾기
여러분 소답동이라는 동네를 아시나요?
이곳은 과거 창원의 중심지이자
창원읍성이 있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창원은 어떻게 만들어진 도시일까요?
조선 초로 돌아가 봅니다.
조선 개국 후 지방 관제는 3대 태종에
이르러 대폭 정비되었는데 지방의 행정구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창의 창과 회원의 원을
합하여 창원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창원읍성은 왜구로부터 백성과 행정시설 및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1476년부터 축조하여
147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읍성의 평면은 북쪽이 돌출된 오각형으로
내동천이 읍성 내를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이 창원읍성의 특징입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12자 7치이고,
둘레는 4,410자(R)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둘레는 1,700m이며 높이는
약 5~7m로 추정됩니다.
성문은 동서남북 네 곳에 설치되었는데
남문은 진남루, 동문은 향양루, 서문은 망미루,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습니다.
각 문지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이 설치되어 있었고 성벽에는
돌출된 치성 18기가 배치되었습니다.
성벽 상부에는 여장 600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읍성의 북측 내동천 입수구위에
시유루라는 누각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수원화성의 화홍문과
유사한 형태로 추정됩니다.
창원읍성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동헌 앞에 우샘, 향교 옆 좌샘, 객사 앞 북동샘.
남산 앞에 대밭샘이 있었으나
우샘은 초등학교 확장 시 좌샘은 철로로
대밭샘은 아파트 건축으로 없어지고
현재의 북동샘만 남아있습니다.
북동샘은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수질 또한 양호하여 부임하는 부사마다
감탄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 세자 등의 기일과 탄신일에
의례를 올리고,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와 연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던 객사는 현 북동 시장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창원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은 평근당이라 하였는데
그 터는 현재 창원 초등학교입니다.
조선 전기의 동헌은 동문 근치에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지금의 창원초등학교터로
이전하였습니다.
창원읍성의 공간구조와 가로 구성은
조선이 추구한 지방 도시의
규범을 잘 따르고 있으며 동헌의 이전은
조선 후기 읍성의 공간구조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창원 북동 유적
(창원읍성 발굴지)으로 가봅니다.
현재 위치는 체성, 치성, 해자 일부로
창원 읍성의 북동쪽 일부 유적에 해당합니다.
체성은 성의 몸체를 말하는데
세종 20년에 반포한
축성 신도의 규정에 따라 쌓아 올린 것입니다.
체성의 규모는 너비 8m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의 높이는 외벽 기준 1.8m입니다.
내벽에는 성 밖에 모인 빗물을
성 안으로 끌어당겨서
모을 수 있는 수구가 있습니다.
체성에 딸린 치성은 접근하는 적을
빨리 관측하여 방어,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은 시설입니다.
치성의 원래 규모는 7.6mx7.6m로
추정되나 현재 남은 부분의 높이는 3.5m입니다.
해자는 성의 바깥 둘레를 따라
도랑처럼 판 방어 시설로 너비 5m,
깊이 2.1m 정도입니다.
해자의 바닥에는 나무를 창살처럼 깎아
세운 함정 방어구인 목익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창원읍성은 현재 도시화로 원형을 알 수 없지만
수차례 발굴조사와 연구 성과로
그 형태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창원읍성 성벽 조형물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천주로12번길 35)
남문터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읍성로34번길 21)
북동샘(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의안로55번길 30-10)
객사터(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동 249-7)
창원 북동 유적(창원읍성 건물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동 1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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