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역사여행, 곡성에서 비롯된 천주교 정해박해 수난의 역사
정해박해가 일어나기까지 간략한 천주교 역사
이수광이 1611년(광해군 3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서 천주교의 교리를 동양의 사정에 맞도록 요약한 천주실의를 소개한 이후 신진학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 차원을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정조 때 천주교가 신앙으로 자리 잡을 조짐이 보이자 그들을 잡아드리는 등의 탄압은 있었지만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1800년 경부터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는 등 천주교인이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천주교를 대하는 시각은 당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사학죄인으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어요. 대신 남인 계열은 서양의 새로운 학풍이니 탐구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1801년(순조 원년) 11살로 즉위한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정순왕후 김씨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정책은 대대적인 천주교도의 색출이었습니다. 그 여파로 정약용을 비롯한 주로 남인 계열에 속한 사대부나 천주교도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신유박해(1801년)입니다.
이때 천주교의 폐해를 나열하고 이를 어기면 국법으로 처단한다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여 천주교 탄압을 위한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천주교는 이십 년이 넘도록 별일 없이 넘어가면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질긴 명맥을 이어가며 은밀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심지어 천주교 척결에 앞장선 노론의 안방까지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곡성현 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당고개 너머 덕실마을에 타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제법 규모를 갖춘 옹기점이 형성되었습니다. 계속된 흉년과 전염병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유민(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넘치던 시절이라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그들이 천주교인임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천주교도 색출과 탄압의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그 사건이 1827년 2월에 시작된 정해박해입니다.
차주원의 고변
1827년( 순조 27년) 2월 곡성현감 성긍묵은 급하게 고변할 것이 있다고 동헌 마당에 엎드린 차주원을 취조하다가 충격적인 진술에 자지러집니다. 동헌 마루에서도 빤히 보이는 당고개 너머 덕실마을 옹기점이 천주학쟁이 소굴이라는 고변 때문이었습니다. 성긍묵은 뒷목을 잡았습니다. 곡성현감 자리는 아주 좋은 요직은 아닐지라도 2년 임기를 빈둥거리며 채우기에는 여기만큼 좋은 자리가 없어 성긍묵은 나름 만족해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다스리는 곡성, 그것도 동헌 지척에 천주학쟁이들이 숨어 있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천주학이 자취를 감춘 지가 언제인데 필시 고변이 잘 못됐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변자 차주원에게는 물증부터 가져오고 형방에게는 진상을 파악하라 지시하였습니다.
곡성현감 성긍묵의 고민
정순왕후가 죽자 후광을 입었던 벽파가 숙청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득세한 이후에는 천주교를 입에 올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버려 둘 따름이지 천주교도가 은밀하게 교세를 넓혀나가고 있다는 조짐은 도처에서 포착되었습니다. 곡성현감 성긍묵도 권력을 쥔 안동김씨 내실까지 천주교가 퍼져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는 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일을 키웠다가는 자칫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고변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고심이 더욱 깊어 곡성에 속한 남원부 부사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덕실마을 옹기점에 살게 된 차주원
차주원은 무안에서 소작을 부쳐 먹고살던 상민이었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고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무작정 지리산으로 향했어요. 지리산에 가서 화전이라도 일구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터였습니다.
지리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우연히 들른 곳이 곡성현 덕실 옹기점이었습니다. 촌장인 이사득은 밥도 배불리 먹여주고, 헛간이 아닌 방까지 내어주는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가마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옹기점은 옹기 가마에서 옹기그릇을 구어서 파는 업을 하는 일로 소 잡는 백정과 마찬가지로 주로 하층민이 종사하는 직업입니다. 상민은 물론이고 노비조차도 옹기 굽는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었었다면 차주원도 옹기점 일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거두어준 이사득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차주원은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옹기를 파는데 남다른 소질을 발휘하며 덕실마을에 빠르게 적응하고 형편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친형처럼 여기는 이사득은 옹기점 사람치고는 말투도 점잖고 아는 것이 많아 범상치 않아 보였지만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습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차주원
차주원은 마을 사람들이 밤마다 모여 뭔가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사득에게 물었습니다. 이사득은 자신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차주원은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천주학쟁이는 부모 자식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고 오직 천주만 숭상하는 사람들이라서 나병환자보다 더 멀리해야 할 무서운 존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다가는 자칫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두려웠습니다. 친 형님 같은 이사득과 다정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천주학쟁이라니, 사지가 벌벌 떨리고 하늘이 노랬습니다.
이사득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차주원을 진정시켰습니다. "천주학쟁이는 부모 자식도 모른다. 임금도 섬기지 않는다. 이런 소문은 다 거짓말이네. 다만 마음속으로 천주님을 섬긴다는 것만 다를 뿐 이네. 자네가 알아야 할 때가 돼서 이야기해 준 것뿐일세. 천주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네가 여길 떠나도 붙잡지 않겠네. 천주학쟁이라고 관아에 발고를 해도 원망하지 않겠네. 자네 마음 가는 대로 하시게" 차주원은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이사득을 찾아가 고백을 했습니다. " 저도 형님을 따라 천주학쟁이가 되겠습니다"
그때부터 차주원과 그의 아내도 마을 모퉁이 헛간에서 열리는 비밀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롭고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차주원은 진실로 천주님이 자신을 돌봐주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정해박해의 발단
어느 날 충청도에서 왔다는 무리들이 덕실마을로 들어왔습니다. 미사도 이사득 대신 그들의 우두머리가 이끌었습니다. 그들이 들어온 이후부터 마을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한백겸은 나이가 가장 어려 보였는데도 행동거지가 매우 불량했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몰려서 죽은 지체 높은 양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나이 많은 마을 사람한테 함부로 할 때마다 차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이사득이 눈치를 채고 그 사람들은 중국에서 신부님을 모셔오는 큰일을 도모하는 중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당부하는 바람에 차주원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덕실마을에서는 가마를 한 채 더 만들기로 하고 그 일을 차주원에게 맡겼습니다.
옹기가마를 다 짓고 불을 지펴 처음으로 옹기를 꺼내는 날 덕실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차주원은 태어나서 이토록 좋은 날이 없었습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잔치 주인공이었기 때문입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아내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듣고 차주원이 달려갔습니다. 술에 취한 한백겸이 아내한테 손찌검을 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이년아 술 한잔 따라 달라고 농을 했을 뿐인데 뭘 그리 잘못했다고 감히 쌍것이 얼굴을 치켜들고 노려보는 것이냐" 그러자 주원의 아내도 물러서지 대들었습니다. "여그 양반 쌍놈이 어디 있당가요. 양반이먼 더 점잖해야제. 요로코 허는 짓거리를 보면 호로 쌍놈이나 다름없제" 그러자 한백겸이 아내의 뺨을 갈겼습니다. 차주원이 달려와 주먹으로 한백겸의 면상을 갈기고 허리를 잡고 들어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습니다. "아이고 이놈이 나 죽이네" 하며 뒹구는 한백겸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새끼 너 오늘 나한테 죽어야 쓰것다" 그러자 한백겸과 함께 온 무리들이 차주원에게 달려들어 몽둥이찜질을 퍼부었습니다. " 쌍것이 양반을 패? 반상의 법도대로 한다면 네놈과 니 마누라 년은 죽은 목숨이니 다름없어 이 자식아." 마을 사람들이 뜯어말리면서 그날 사달은 끝이 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잔치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득은 설음에 겨워 통곡하는 차주원을 달랬습니다. "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니 술이 깨면 사과를 할 것이네 자네가 조금만 참게" 다음날 한백겸과 무리들을 만났을 때 사과는커녕 침까지 뱉으며 차주원을 모욕했습니다. 그런 꼴을 당하고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던 차주원은 곧장 관아로 달려가 평소 안면이 있던 아전한테 덕실마을이 천주학쟁이 소굴이라고 고변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전이 그를 곡성 현감 성긍묵에게 데려간 것입니다.
정해박해 시작되다.
곡성현감 성긍묵은 덕실마을이 천주교도 소굴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는 아전의 보고를 받고 처음과 달리 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세자의 수렴청정이 막 시작되면서 천주교를 방관했던 벽파에서 천주교를 막아야 한다는 시파로 넘어가는 정황을 남원 부사에게 전해 들은 터였습니다. 이번 기회가 출세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덕실마을 천주교도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편 안절부절못하던 차주원은 관아에 발고했다는 사실을 이사득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이사득은 한백겸을 비롯한 충청도에서 온 무리들과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켰지만, 옹기를 팔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걱정되어 난감했습니다. 다음날 이사득은 먼발치에서 사령들이 마을로 들이닥치는 것을 찢어지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곡성현 동헌 마당에는 덕실마을 옹기점에서 잡아온 23명의 천주학쟁이들이 굴비 두릅처럼 묶여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성연묵이 직접 그들을 한 명씩 추긍했습니다. 차주원 내외를 비롯한 자신은 천주학쟁이가 아니라고 항변한 다섯 명은 즉시 풀어주었습니다. 나머지 18명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사득 매제 이근도 있었습니다. 성현감은 이근에게 집중적으로 수괴 이사득의 행방을 추긍했습니다. 이근은 의외로 순순하게 이사득이 정읍 모처로 피신한 것 같다는 자백을 하였습니다. 성연묵은 곧장 전라 감영에 통보하여 사령들을 급파했지만 오래전 머물렀던 흔적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사득과 나머지 천주교인들이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거짓으로 자백을 한 것이었습니다.
정해박해 광풍이 전국으로 확산되다.
전라감사의 지시에 따라 곡성에서 체포된 천주교도 18명은 모두 전라감영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곡성에서 천주교도가 발각된 시점에 병약한 순조 임금 대신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권력의 주도권도 외척인 안동김씨에서 시파로 넘어갔습니다. 동시에 이번 사건을 엄정하게 다루라는 비답이 전라감영에 내려왔습니다. 이에 힘입어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천주교도 색출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추포조를 파견했습니다. 경상도 상주에서는 신태보 베드로가 한양에서는 이경언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습니다. 경상 감영과 충청 감영도 경쟁적으로 천주교도 색출에 나섰습니다. 상주에서는 앵무당 교우촌이 발각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도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신자들이 속속 붙잡혀 충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렇게 한양도성, 충청, 전라, 경상 등지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다 합쳐서 500명에 이르렀습니다. 대부분은 배교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고, 일부는 즉시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최악의 고통속에서 죽어간 정해박해 순교자들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거나 죄가 중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전주 감영에 가둬놓고 문초를 가하며 은신처를 캐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을 얻어 6명이 먼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나머지 8명도 계속 가둬놓고 있다가 12년 후에 있었던 기해박해(1839) 때 잡혀 온 천주교도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며 순교했습니다. 이전과 이후 거듭된 박해로 인한 무수한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정해박해 때의 순교자 14명이 당한 고초가 가장 악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해박해 순교자들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이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 모두 시복되었습니다. 한편, 덕실마을 옹기점은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계속 운영되었습니다.
역사적 근거가 미약한 샤를르 달레 신부의 정해박해 기록
정해박해를 촉발한 곡성 천주교도 색출 사건에 대해서 대부분의 문헌은 샤를르 달레(1829~1878) 신부가 사건이 발생한지 50년 이후에 펴낸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1874년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그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 곡성 덕실마을에 옹기점이 있었고 주민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 전이라는 교우가 그 마을에 주막을 운영했다.
△ 마을 사람 중 순교자 토마스 한의 아들 한백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 포악한 성격의 한백겸이 주막에서 행패를 부리고 주인 아내에게 손찌검했다.
△ 전이가 천주교 증거물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곡성 현감에게 고발했다.
△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곡성 관아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 이 일로 전라도 일대가 박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샤를르 달레신부의 [한국천주교사]에 실린 정해박해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지 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 구전을 정리한 것으로 역사적 근거도 미약합니다. 따라서 곡성에서 발생한 천주교도 검거 사건에 대한 실체적인 진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적 근거에 의해서 재구성된 정해박해
논문 [ 정해박해와 곡성 ]
반면에 정해박해를 심층적으로 연구해온 조준원 곡성문화원장이 펴낸 [정해박해와 곡성]에 수록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현장에서 적은 상세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어 정해박해가 일어났던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재구성하였습니다.
△ 이사득은 덕실마을 옹기점 촌장이며 천주교 지도자다.
△ 이사득은 정체가 탄로 난 사실을 사전에 알고 도주했다.
△ 옹기 가마에서 타다만 천주교 서적 등 일부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 덕실마을에 천주학쟁이가 있다고 고발한 사람은 차주원이다.
△ 주막집 주인 전이와 한백겸이란 이름은 기록에는 없다.
△ 덕실마을에서 잡혀간 사람은 23명이고 이중 죄가 가벼운 5명을 제외하고 18명에게 죄를 물었다.
△ 곡성현으로 잡혀 온 자들은 은신처를 거짓으로 알려주는 방법으로 도주자들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여기에 소개한 정해박해 이야기는 [ 변방곡성 세상을 바꾸다]에서 발췌한 것으로 논문 [정해박해와 곡성]을 뼈대로 하고 이야기 구성을 위해서 거기에 한백겸을 추가하였습니다. 200여 명에 이르렀다는 이사득을 비롯한 덕실마을 사람들의 행적은 밝혀진바 없습니다.
천주교 광주 교구에서는 정해박해를 촉발하고 천주교도들이 잡혀 와 문초를 받고 갇혀 있던 곡성현 동헌과 옥사가 있던 곳에 본당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1958년에 성당을 완공하고 10월 축성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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