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 기형도 <10월>중에서 -

10월, 기형도 문학관에 방문했습니다.

시월인데도 아직 정오의 햇빛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오늘의 이 햇빛은 가을 곡식을 익게 하는 고마운 햇볕이라 생각합니다.

기형도문학관 입구에서 만난 시인은 여전히 환한 청년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60년대 태어나 스물아홉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

어린 시절의 가난과 청년기의 고뇌와 번민들이 그대로 작품 속에 녹아있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는데 당선작이 바로 '안개'입니다.

시인이 늘 걸었던 광명의 안양천 둑길이 배경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이곳 안개의 공간에 들어서면 실제 안갯속에 갇혀있는 느낌이 듭니다.

아, 발등 위로도 안개가 흐르고 있는 느낌이에요.

문학관에는 시인의 작품들이 시간과 공간을 따라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워낙 짧은 인생을 살았다 보니 남긴 유품도 그리 많지는 않아요.

노래를 잘 불렀다는 시인이 들었던 음악 테이프와

낡은 만년필 한 자루를 보니 마음이 애잔합니다.

다른 몇 개 체험공간과 전시가 있는데 그중 <기형도 소리에 담다>는 직접 기형도 시인의 대표 시 10편을 읽고 이메일을 발송하는 전시입니다.

또한 시를 직접 필사하는 공간도 있고 낭송을 들을 수도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건물 이층에는 기형도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필사한 기형도 시집 전시가 있고

휴식공간과 도서관도 자리하고 있어요.

문학관을 둘러보고 건물을 벗어나 뒤편으로 나오면 공원과

조용한 산책길을 만날 수 있답니다.

처음 만나는 산책길에서 책 읽는 조각상을 만났습니다.

이 길에서는 사색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마른풀 위로 밤송이들이 뒹굴고 숲은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색의 숲길을 따라 걷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외에는 완전 고요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나뭇잎 냄새와 낙엽 밟는 소리만이 시간을 채웁니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여줄 뿐..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걷는 도중 펼친 시인의 10월 이란 시를 나직하게 읽어봅니다.

시인이 사랑했던 시월의 숲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이제 가을 열매와 풀들은 작고 둥글게 영글어가는 중입니다.

꽃들도 안간힘을 다해 향기와 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걷다 보니 길을 따라 세워진 시비가 보입니다.

시인의 작품들을 되뇌면서 걸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단단한 돌 위에 새긴 시편들을 만져보니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감촉이 참 따듯하네요.

빈집을 만나 잠시 그 쓸쓸함에 기대 보기도 합니다.

시길 끝까지 오면 측백나무 도열한 숲이 펼쳐집니다.

저 언덕을 넘으면 또 어떤 풍경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기형도 시길은 다채롭고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서

사색과 산책에 더할 나위 없는 멋진 길들이에요.

니체도 칸트도 다 산책을 즐겼던 시인과 철학자들이죠.

지난여름, 더위에 지쳐 책 한 권 제대로 못 읽고

계절을 지나왔다면

기형도 문학관에 오셔서 시인의 생애도 만나고

가을빛 짙어가는 시길 산책은 어떨까요?

걷는 것만으로도 기형도의 시 세계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가을이 깊어진다면요.

▪ 기형도문학관 관람안내

관람일: 화요일~일요일(월요일 휴관)

관람시간:09:00~18:00(3월~10월), 09:00~17:00(11월~2월)

광명시 온라인시민필진 푸른종이 (박영선)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g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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