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시간 전
[부산 산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6코스ㅣ수정산, 왜관을 관장하던 수정(水亭)에서 발원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부산을 대표하는 산,
그곳에서 '부산문화유산'을 찾아보는 답사기
「부산 산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여섯 번째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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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산, 왜관을 관장하던
수정(水亭)에서 발원하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6 코스 |
두모포왜관비 ▶ 고관공원 터 ▶ 두모진해관비 ▶ 부산진 매축 기념비 ▶ 부산진 지역 매축지비 ▶ 문화공감수정 ▶ 망양로 ▶수정배수지 ▶경부철도 용지 표지석 ▶ 수정동 목장성 ▶ 안창마을 |
코스 6ㅣ수정산, 왜관을 관장하던
수정(水亭)에서 발원하다
수정산이 위치한 동구 수정동 일대에는 과거 두모포왜관이 있었다.
왜관을 관장하던 곳이기 때문에 바다를 살피는 ‘수정(水亭)’이 필요했고, 수정동과 수정산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두모포왜관의 70년 역사는 이후에도 수정산 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70년 고관의 역사가 여기에
두모포왜관
너무 소박한 두모포왜관비
위용을 자랑하는 임진왜란의 영웅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 쪽으로 걷다 보면,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 두모포왜관비에 닿는다. 방형의 대리석 축대와 비신으로 구성된 단순한 외형인데, 두모포왜관의 간략한 내력을 해설하고 있다.
왜관은 조선의 교린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하였다. 건국 후 조선 정부는 왜구의 노략질에 대해 무력으로 대처하는 한편, 부산포와 제포(내이포, 현재 진해)에 이어 염포(현재 울산)를 차례로 개항하여 교역에 종사케 하면서 ‘교린’ 하였다.
일본인들이 두모포왜관을 기억하는 공간, 고관공원 터
멀리 수정산의 능선을 보며 수정로를 따라 두 블록만 가면 고관로와의 교차점 오거리를 만난다. 이어서 구청로 방향으로 몇 걸음 올라가니 동구 국민체육문예센터와 동구청 입구에 닿는다. 이 언덕에 일제강점기 부산을 대표하는 3대 공원 중 하나였던 고관공원이 있었다.
이곳을 포함하여 수정전통시장 일대를 흔히 두모포왜관 터라고 한다.
1640년 처음 왜관 이전 문제가 제기된 이래 30년 이상 이어진 양국 간 줄다리기는 결국, 1672년 교섭을 위해 동래에 왔던 쓰에 효고[津江兵庫]가 급사하면서 타결 방향으로 급물살을 탔고, 이듬해 초량왜관에의 이전이 결정되었다. 두모포에 묻힌 쓰에는 일본인들에게 ‘왜관의 영웅’이 되었다
또 다른 개항과 재연된 갈등, 두모진해관비
개항 과정에서 두모포에서의 진통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에서도 재연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있었던 양국 사이의 갈등과 가장 큰 차이점은 두 나라의 입장이 서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부산항 개항으로 일본인들은 초량왜관 담장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겠지만,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안하무인격 행패와 각종 이권 침탈에 분개하였다. 이에 개항 후 양국 간 갈등이 다시 한번 두모포에서 폭발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보장하였으므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일본은 많은 상품을 싣고 와 조선에 저렴하게 팔면서 큰폭리를 취했고, 조선산 곡식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두 개의
부산진 매축비
풀지 못한 수수께끼, 부산진 매축 기념비
수정동을 포함하는 동구 일대의 근대는 ‘매축’이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매축이란 바닷가나 강가를 메워 뭍으로 만드는 작업을 말하는데, 근대도시 부산은 사실 매축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두산 일대의 초량왜관 터는 애초부터 일본인 거주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계된 공간이므로, 1876년 개항으로 그 담장을 허물었다고 해도 그들이 꿈꾸는 ‘대륙으로의 현관’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부산진 매축은 도시의 미래와 이권 확대를 위한 선결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부산진 매축 공사가 마무리된 이후인 1939년 4월 건립된 것이다.
위치도 내용도 애매한 부산진 지역 매축지비
부산진 매축 사실을 기록한 또 하나의 비가 있다. 두모포왜관비를 등지고 서면, 짧은 횡단보도 건너 잔디밭 한쪽에 화강암 재질의 부산진 지역 매축지비 이하 매축지비가 있다.
비문에는 부산진 매축 공사의 개요가 새겨져 있다. 즉, 1913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진매축주식회사가 고관, 부산진, 범일동, 문현동, 우암, 적기에 이르는 도로 우측 해안 쪽을 매축하여 시가지를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 면적은 1938년까지 1,505,882㎡(약 455,529평)에 이른다고 한다. 1983년 2월 부산직할시에서 설치한 것인데, 묘하게도 2기 공사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이를 맡은 부산진매축회사에 관한 이야기만 기록한 것이 흥미롭다.
적산에서
휴식의 공간으로
일제시기 고급 주택의 모델, 수정동 일본식 가옥(문화공감 수정)
건립 연도는 일제 말기인 1943년이다. 해방 후 민간에 불하되면서 일부 개량과 증축이 진행되었으나, 200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증축 부분의 철거와 복원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이를 적국인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이라 하여 ‘적산가옥’이라 흔히 불렀으나, 요즘에는 이런 감정적 표현보다 ‘일본식 가옥’이라는 객관적 용어로 지칭한다. ‘정란각’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이 되어 1970년대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2010년 문화재청이 부지를 매입하여, 2012년부터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하면서 ‘문화공감 수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망양로 노스탤지어
수정외솔로7번길 앞에 서면 눈 앞에 펼쳐진 압도적 ‘계단 지옥’의 경관이 펼쳐진다. 매축만큼이나 부산의 역사를 상징하는 단어는 산복도로일 것이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은 부산의 특성상 일자리를 찾아 부산진 매축 공사 현장에 들어온 외지의 노동자들은 인근 수정산의 경사면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제시기부터 형성된 수정동 판자촌은 해방 후 귀환동포와 한국전쟁 피란민들에 의해 고지대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에는 고향을 떠나 부산진 일대 공장에 취업한 노동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집집마다 근대 문명을 전했던 수정배수지
수정배수지는 일제시기 건립된 상수도 배수지이다. 배수지란 수돗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물 저장소를 말한다. 개항 후 일본인 이주민과 타향에서 온 조선인 노동자로 인해 시가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크게 늘자,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범어사 정수장에서 생산된 수돗물을 받아서 수정동 등 동구와 원도심 지역으로 급수하였는데, 그 양은 약 4만 5,000명분이었다고 한다. 1928년 착공하여 1931년 준공하였다.
수정산을
오르내리며
수정산에 철도 용지라니 … 경부철도 용지 표지석
수정공원상로20번길 끝까지 계단을 오르면 백련정사를 만난다. 수정배수지에 오르는 길 못지않은 ‘계단 지옥’이 있다.
그리고 구봉산과 수정산 사이인 이곳에서 ‘경부철도용지京釜鉄道用地’라는 글자가 새겨진 화강암 표지석 4기가 최근 발견되어 현재는 부산근현대역사관에 서 보관·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8~1901년 사이 이 일대가 경부선 철도 예정지로 선정되어 표지석을 설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는 바람에 비석만 남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목장성과 정상석
수정산 정상으로 향하면 수정동 목장성이 보이는데, 조선시대 때 현재의 동구·서구·사하구 일대에 있었던 오해야항 목장의 외성이다. 영도에 목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이곳도 목장이었다는 사실은 다소 생소하다.
「목장지도」가 그려진 1663년은 두모포왜관 시절이었고, 외성은 왜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오해야항 목장의 북쪽을 막고 있다. 현재 수정동 부산동여자중학교 뒤쪽에서부터 가야, 개금에 걸쳐 1.7㎞ 정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관 측 외성의 일부를 본 것이다.
수정산 315m이라고 새겨져 있는 정상석에 닿았다. 눈앞에 백양산이 펼쳐져 있고, 수정산터널에서 백양터널까지 고가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필자가 찾은 날은 마침 화창한 날씨여서 서쪽으로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황령산과 장산까지 또렷하였다.
수정동에서 안창마을까지, ‘누나의 길’에서 만나다
1978년 안창마을 이주 후 28년 동안 통장을 역임했다는 한 주민의 구술에 의하면, 과거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무허가였는데, 지금은 토지개발공사로부터 모두 불하를 받았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철거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어 삶이 곧 구청 단속반과의 전쟁이었다. 무허가 주택이다 보니 수도나 전기를 가설할 수 없었고, 이 문제가 1990년대 초에야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 일대 신발공장까지 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별을 보고 퇴근했던 누나들을 통해 팍팍한 생활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전성기’ 안창마을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안창마을만의 이야기이겠는가? 부산진 매축지와 수정동 산복도로 곳곳의 노동자들 사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정산 자락의 부산 근현대사 답사를 이곳 누나의 길에서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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