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어요.

국가유산기본법 시행과 함께 [문화재]라는 명칭이 [국가유산]으로 바뀌었습니다. 더불어서 국가유산을 전담하는 '문화재청'의 명칭도 '국가유산청'으로 바뀌었어요. 훨씬 더 세련된 느낌이 듭니다. '국가유산'이란 무엇이 있을까요?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문화재청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 세 종류가 있습니다.

  • 「문화유산」 우리 역사와 전통의 산물로서 문화의 고유성, 겨레의 정체성 및 국민 생활의 변화를 나타내는 유형 유산

  • 「자연유산」 동물·식물·지형·지질 등의 자연물 또는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조성된 문화적 유산

  • 「무형유산」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공동체·집단과 역사·환경의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된 무형의 문화적 유산

그중 문화유산에는 국보. 보물. 사적. 명승 등이 있습니다. 보물은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무구 등의 중요한 유형문화유산을 말합니다. 그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국보로 지정되는데 아쉽게도 곡성에는 아직 국보급 국가유산은 없습니다. 앞으로 설명드리게 될 적인선사탑에 대해서 국보 지정에 대한 검토가 진행 중입니다. 곡성이 보유한 국가문화유산 보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물 태안사 일주문

산사 박물관 태안사

곡성은 보물로 지정된 국가문화유산을 모두 10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6종이 태안사에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문화유산을 보유한 태안사는 그 자체가 박물관입니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 탑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습니다. 태안사의 옛 이름 대안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적인선사 혜철(惠哲)이 대안사를 중심으로 속한 동리산파를 열었습니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누어지는데, 아래 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습니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묵직하면서도 너그럽다는 느낌을 줍니다.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여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매우 뛰어난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탑비에 적인선사가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한 기록돼 있어 이 탑도 적인선사가 열반에 든 861년에 만들어 세워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적인선사탑의 빼어난 예술성과 역사성이 국보급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어 국보 승격을 추진 중입니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 탑

태안사 입구 탑전에 있는 고려 시대의 승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가 모셔셔 있습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3대 조사(祖師)로, 신라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고려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입니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 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습니다. 위 받침에는 16잎씩의 두 줄로 조각된 연꽃이 우아하게 장식돼 있습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 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습니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 머리장식 부분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습니다. 이 탑은 완벽한 형태미와 함께 각 부의 구성과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로워 국가 문화유산 보물로 등재되었습니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 탑비

태안사 탑전에 있는 탑비로, 고려 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입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았습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이 ‘광자’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 남아 있습니다. 거북 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 있는 상태입니다. 거북은 목이 짧아 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습니다. 머릿돌에는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 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워졌습니다.

곡성 태안사 청동 대바라

바라란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하는 타악기입니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냅니다.

태안사 대바라는 지름 92㎝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제작 방법이 우수합니다. 외곽의 일부만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 없는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태안사 대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 치기보다는 매달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곡성 태안사 동종

태안사에 소장된 조선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종입니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돼 있습니다. 어깨 위를 돌아가며 입화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넓은 몸체에는 네 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연뢰를 나지막하게 돌출 표현하였습니다. 몸체의 하대는 종구에서 조금 올라와 배치되었는데,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

「곡성 태안사 일주문」은 2017년 보수공사에서 확인된 상량문을 통해 1521년(중종 16년)에 ‘조계문(曹溪門)’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량문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수결(手決, 서명)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태안사는 6‧25전쟁 당시 거의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일주문과 능파각(凌波閣)은 건재하였습니다. 일주문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 뒷면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은 정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의 평방에 5개 공포, 전체 12개 공포를 올린 다포식 공포 구조로 겹처마 지붕구조입니다. 주기둥의 양쪽과 앞뒤로 창방(기둥머리에 가로로 맞추는 목재) 모서리 네 곳에 보조기둥을 세웠습니다. 주기둥 상부에는 내부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였고 용두는 두 뿔, 큰 눈, 눈썹, 크게 벌린 입과 이빨, 머리 뒷부분의 갈기 등이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상량문에 의해서 조선 전기에 세워졌음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보수하면서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큰 유적입니다.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도림사 문화유산

도림사에는 괘불탱과 아미타여래 설법도 등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도림사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천년고찰임에도 숱한 전란과 천재지변으로 인해 찬란한 유산들이 오늘에 전해지지 못한 부분은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곡성 도림사 아미타여래 설법도

아미타여래설법도는 도림사 보광전의 후불화로 봉안돼 있습니다. 1730년 철매(哲梅)의 증명 아래 수화원(首畵員) 채인(彩仁), 진행(眞行), 즉심(卽心), 각천(覺天), 책활(策活) 등의 당대 손꼽히는 화승들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주도하여 그린 채인과 즉심은 1723년 흥국사와 1725년 송광사 불화 제작 때 의겸(義謙)을 수화사로 모시고 함께 작업을 한 대표적인 의겸파 화원입니다. 진행과 각천은 1730년 운흥사 괘불 조성 때 의겸을 도왔습니다. 또한 의겸을 비롯해 채인, 덕민, 지원, 각천, 책활 등은 같은 해(1730년) 공주 갑사의 ‘석가여래삼세불도’를 함께 제작하였을 만큼 이 들은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도림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의 제작 의도와 달리 단독의 후불 벽면에 걸기 위해 조성된 불화로서, 갑사의 그것보다 좌우 폭이 넓어졌으나, 인물의 표현이나 구성, 묘선, 색채, 문양 등 도상이나 양식의 면에서는 대체로 갑사의 화풍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의 화풍이 그의 유파 화원들에게 어떻게 스며들고 발전되어 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적·녹색의 강한 색 대비 속에 백색, 황토, 양녹, 갈색 등 부드러운 중간 색조가 안정적으로 뒤받쳐 주고 있는 설채법, 그리고 유려한 필선, 중후한 이목구비를 가진 상호 등에서 1724년 송광사 응진전 영산회상도, 1725년 송광사 영산회상도 등 당대의 최고의 화승(畵僧) 의겸(義謙)의 화풍을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를 비롯한 팔대보살, 그리고 권속들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짜임새 있는 화면구성을 갖추었고, 정취하고 유려한 필선과 중간 톤의 안정된 색감과 문양을 통하여 우수한 화격을 보여줍니다. 18세기 전반기 유행한 화풍과 화사간의 교류를 통한 화맥(畵脈)의 전승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이 작품은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곡성 도림사 괘불탱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을 말하는데 도림사 괘불탱은 중앙에 석가불과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석가삼존도 형식입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본존불 좌우에 연꽃 가지를 들고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의 문수보살은 보관에 조그만 부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오른쪽 보살과 다릅니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계오·삼안·신균 등의 세 화원 비구가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화기가 있어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또한 자료가 귀한 석가삼존불 형식으로 그 색채 구성과 문양 표현, 인물의 형태 등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17세기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다른 국가문화유산 보물

곡성은 백제에서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지역입니다.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 정유재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백제계의 사찰과 유물이 대부분 사라져 버린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인 관음사 원통전과 금동 불상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국보로 지정돼 있었으나 공비토벌 과정에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소실된 관음사 금동 불상과 원통전

곡성 도림사 괘불탱

가곡리 매봉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입니다. 가곡리 오층 석탑의 맨 아래 바닥돌은 시멘트로 만든 기단에 묻혀 있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탑의 아래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없으나 웃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습니다. 5층의 지붕돌은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었는데, 1층 몸돌은 4매의 돌, 2층 이상의 몸돌은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남쪽면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감실의 효과를 내었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의 지붕돌받침은 3단이고, 5층 지붕돌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나 양 끝의 귀마루가 매우 두텁게 표현되어 백제계 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붕돌의 처마선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습니다. 특히, 매 층 지붕돌 위에 또 다른 돌로 몸돌 받침을 만들어 몸돌을 괴고 있는 점은 매우 특이합니다. 이 석탑은 맨 윗부분인 상륜부를 제외한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고려 시대에 건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담양 남산리 오층 석탑(보물)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히, 탑신과 지붕돌에 나타난 표현양식과 더불어 몸돌 받침이 있는 점은 고려 시대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조각 기법이 매우 세련되며 안정감을 보이는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백제 옛 터에서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입니다.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

마천목좌명공신녹권은 조선 태종 1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上將軍) 마천목(馬天牧)에게 발급한 것으로 필사본입니다.

좌명공신은 조선 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로 마천목은 후에 태종(1367-1422)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稱下)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 하였는데 이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습니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입니다. 조선 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식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또한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은 공신관계 연구 자료로서, 공신도감 구성원은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조선 초기에 지정된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국보)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을 상기하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본 포스팅에 작성을 위하여 국가문화유산 포털의 자료를 인용하고, 일부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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