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일 전
곡성 여행 산사순례, 옥과 설산 성륜사와 시대의 스승 청화스님
청화선사와 성륜사
옥과면 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성륜사는 태안사, 도림사, 관음사와 함께 곡성의 대표 사찰입니다. 태안사. 도림사. 관음사가 천년고찰이라면 성륜사는 이 절을 세운 주인공 [청화선사]가 갖는 상징성이 무게 있게 다가오는 절입니다. 성륜사는 대웅전, 지장전, 조선당, 육화당, 안심당, 법성당, 설령각, 정운당, 범종각, 적멸보궁과 각종 부속건물로 구성돼 있는, 규모와 형식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춘 대가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과 성륜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랜선 순례 여행을 떠나보시죠.
고려의 사찰 '나암사' 터에 다시 세운 '성륜사'
일주문에 설령산 성륜사(雪靈山 聖輪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요. 성륜사가 자리 잡은 곳이 옥과면 설산 남쪽에 있는 설령골입니다. 성륜사는 1988년 세워진 사찰인데 왜 '중창'이라 하는 것일까요? 원래부터 마을 사람들이 절골이라 부르는 곳으로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의 기와장이 대거 발견되었죠.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는 이곳에 나암사(羅巖寺)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이곳은 나암사 터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륜사는 나암사의 법통을 잇고 있으니 중창인 거죠. 그동안 3~400년의 공백이 있었으므로 '성륜사는 청화선사가 창건한 절이다'는 정의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범상치 않습니다. 옥과 설산!
'산을 알면 절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륜사를 보기 위해서는 설산(522.6m)부터 알아야겠지요? 우리나라 모든 산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그것을 책으로 펴낸 것은 '산경표' 지도로 나타낸 것을 '산경도'라고 합니다. '설산'은 호남정맥에 속해 있습니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은 내장산을 지나 설산으로 들어와서 무등산을 거쳐 보성. 장흥. 화순. 순천. 곡성을 휘돌아 광양 백운산을 거쳐 섬진강을 바라보며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족보상으로는 무등산. 월출산. 백운산 같은 명산들이 죄다 옥과 설산의 동생입니다. 설산은 얼핏 육산처럼 보이지만 정상에 규암이 하얗게 드러난 바위산입니다. 그것이 멀리서는 눈처럼 보인다고 하여 '설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수행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중 설산수행도가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여 설산이라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금강문이 나타납니다. 금강문은 세속의 찌꺼기를 버리고 부처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을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는 문입니다.
금강문 앞에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있어 순례자의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일진대/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뒷면 글귀는 아마도 청화선사의 친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외우면 현생과 내세에 반드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오리다.
금강문 양쪽에는 사천왕이 눈을 부라리며 지나가는 중생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역할은 수호신입니다. 이들은 각각 지국천왕(持國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증장천왕(增長天王),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네요. 성륜사 사천왕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교한 사천왕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금강문을 지나면 잘 단장된 작은 정원 '석불원'이 눈길을 끕니다. 그곳에는 성륜사에 부지 10만 평을 시주하여 중창불사의 물꼬를 튼 호남을 대표하는 한국화가 아산 조방원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국가등록문화재 안심당과 육화당
석불원 위쪽에는 여염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옥이 있습니다. '안심당'과 '육화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풍스러운 한옥은 1920년대 지어진 구례의 국포고택을 1987년에 성륜사로 옮겨와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직접 가시게 되면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보세요.
전통한옥 건축형식을 따르면서도 일부 근대 건축기법을 부분적으로 적용하여 한옥의 시대적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라 순례객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고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 ( 사진은 사전 허락을 득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촬영하였습니다 )
육화당과 범종각 사이 담장길은 성륜사의 최고 포토존입니다. 아치를 이루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거나, 한 겨울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는 인생샷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성륜사는 산기슭을 따라 전각이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갈한 정원을 갖추고 대갓집 안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요사채인 벽련당과 그곳에 둘러쳐진 정겨운 돌담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삼칸 겹집의 지장전을 지나면 무려 다섯 칸이나 되는 듬직한 몸집에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단청으로 장식된 대웅전이 등장합니다.
성륜사 대웅전은 세워진 지 3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통 사찰 건축 양식이 완벽하게 녹아 있다는 부분과 심혈을 기울여 채색된 흔적이 역력한 예술 작품 경지에 이른 단청, 정교한 창살 문양은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성륜사 설령각은 일반 사찰의 산신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잘 생긴 산신각은 어디서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이 절을 창건한 청화선사와 그분의 스승인 금타선사 영정을 모신 조선당은 성륜사 순례 여행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코스입니다. 대웅전 위쪽 산기슭을 따라서 나 있는 임도를 걷다 보면 조선당으로 가는 진입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평화로운 길입니다. 음미하면서 걸어보세요.^^
성륜사 순례 여행 필수 코스
조선당 영역
‘조선당’은 원래 청화선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열반 후에 그분을 기리는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선당 옆에는 청화선사의 부도와 비석, 청화선사 은사 스님인 ‘금타 대화상’의 부도가 모셔진 탑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청화선사는 누구인가?
청화선사의 본명은 강호성으로 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4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합니다. 젊은 나이에 고향 무안에서 망운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투신하다가 다시 일본에 가서 메이지대학교 1학년을 다니던 중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진해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좌우익으로 편을 나누어 친구와 이웃끼리도 사생결단하며 싸우는 것을 보면서 정신적인 고뇌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우연히 들른 백양사에서 금타스님으로 부터 감동적인 설법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스승인 금타스님으로부터 청화라는 법명을 받은 후 식사는 하루 한 끼만 하고, 잠을 잘 때도 눕지 않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이러한 장좌불와(長坐不臥)수행을 4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갑니다. 사람들은 청화스님을 생불이라 일컬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행 방식뿐만 아니라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며 청빈하고 겸손함을 몸소 실천하면서 더욱 존경을 받았습니다. 불교 수행 방법을 수용하여 근본적인 화해를 도모하는 원통불법 사상과 염불선사상을 체계화하여 누구나 선불교 수행에 입문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한국 불교의 큰 스승입니다.
곡성과 청화선사의 인연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은신한 경찰병력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각 대부분 파괴되면서 태안사는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1985년 청화선사가 20여명의 도반과 함께 찾아와 3년간 묵언결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구산선문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목적이었습니다. 청화선사가 수행하고 있다는 소문에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태안사로 쏠렸습니다. 청화선사의 글 한 줄, 말 한마디에 감동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태안사를 찾아오고 시주가 줄을 이으면서 중창불사와 복원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호남 한국화의 거장 아산 조방원 선생이 옛날에 나암사가 있던 설산 자락 10만 평을 매입하여 시주하고, 대상그룹을 비롯한 재계와 청화선사를 존경하는 신도들이 힘을 합쳐 성륜사의 창건을 도와 그의 법통을 잇게 됩니다. 2003년 이 시대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청화선사가 입적하자 그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려와 성륜사에서 옥과면 소재지까지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선불교 대중화의 선구자 청화선사
염불과 참선은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식입니다. 청화선사는 스승인 금타선사의 실천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못지않게 염불선도 효과적인 수행 방식임을 끊임없이 주창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 결실을 거두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청화선사는 염불도 선을 행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실상염불선이라는 용어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선불교는 간화선만을 유일한 수행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에 청화선사는 현대인이 처한 복잡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수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염불과 선의 결합을 도모한 것입니다. 청화선사는 선불교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입니다.
조선당에서 나와 임도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잘 지어진 법당이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입니다.
성륜사 적멸보궁은 외관도 아름답지만 법당 내부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금강문, 안심당과 육화당, 벽련당, 지장전, 대웅전, 설령각, 조선당, 적멸보궁을 거쳐 내려와서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널찍한 절마당에 도착하면 성륜사 순례여행이 마무리됩니다. 마당에 서서 올려다보면 숲속의 자리 잡은 성륜사의 전각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속에 담깁니다.
사찰 순례 여행은 '뭘 알아야겠다는 마음' '뭘 배워야겠다는 마음' 같은 것은 다 내려놓고 발길 닿는 데로 마음 가는 데로 무심하게 기웃거리며 걷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면, 마음이 정리되었다면, 누군가를 용서하게 되었다면, 나의 잘못을 반성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성륜사는 순례 여행 대상지로 최적화된 곳입니다. 금강문을 나올 때 안내판에 적힌 격언을 한 번 더 읽고 마음에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일진대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마음을 내서 꼭 한번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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