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전
곡성의 국가문화유산 국보로 지정된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 탑]
곡성에는 다양한 국가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올해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는 것을 계기로 이제 곡성도 국보급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적인선사 혜철은 누구?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통일신라시대 선불교의 근거지가 되었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고승 적인선사 혜철의 사리를 모신 승탑입니다. 먼저 탑의 주인공 혜철은 어떤 사람일까요?
혜철(惠哲)은 785년(신라 원성왕 1) 신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 되던 해에 영주 부석사로 출가하여 22세에 비구계를 받는 동안 출중한 능력으로 일찌감치 그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불교 사상이 급속하게 번져감에 따라, 많은 신라의 승려들이 선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814년(헌덕왕 6) 혜철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당나라에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선승인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문하로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아 수제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어 스승으로부터 선불교의 비법을 전수받습니다. 스승이 입적하자, 당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교는 물론, 도교, 유교, 티베트 밀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그리고 서주(徐州)의 부사사(浮沙寺)로 들어가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큰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25년간에 걸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839년(신무왕 원년)에 귀국합니다. 궁으로 와서 국사가 되어 달라는 신무왕의 청을 물리치고, 곡성 태안사로 들어와 가르침을 펼치게 됩니다. 승려는 물론, 일반 백성과 호족들까지 몰려오면서 태안사는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혜철이 개창한 동리산문은 선불교의 본산인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신라의 왕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혜철은 승속을 아우르는 선불교 사상을 통해 신라 말 변혁기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혜철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제자인 도선국사 등을 통해 신라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변혁의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적인선사 혜철의 승탑]은 그의 입적 연도인 861년에 그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아울러 신라 왕실은 혜철에게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는 탑호를 내려줍니다.
적인선사 탑의 구성
돋보이는 사자상
하대석 상단 사자상은 이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갈기털을 세우고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한 사자들의 모습이 재밌습니다. 앞발을 들어 혀로 핥고 있는가 하면 뒷발을 들어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사자라는 동물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묘사하기 힘든 자세들입니다. 사자가 살지 않은 신라 땅에 혹시 동물원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연꽃 조각
상대석 아래쪽 세단으로 이루어진 받침에는 세 겹 연꽃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어요. 그 사이로 꽃잎이 보이도록 하였으니 연꽃은 사실상 네 겹이나 다름없습니다. 연꽃 위쪽으로는 한 면에 두 개씩 꽃문양의 안상을 조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신라의 지붕 양식을 완벽하게 표현
팔각원당형의 탑신석 앞뒤에는 문 모양이 새겨져 있어요.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돼 있습니다. 지붕돌 밑면에는 서까래가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가 표현돼 있어요. 완만한 추녀 끝 귀퉁이가 치켜 올라간 모양은 신라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상륜부
탑의 상륜부는 솟은 연꽃 모양의 앙화(仰花),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복발(覆鉢), 바퀴 모양의 보륜(寶輪), 연꽃 봉오리를 닮은 보주(寶珠)를 화려하게 쌓아 올린 모습을 하고 있어요.
[태안사 적인선사 승탑]은 화려함과 간소함, 역동성과 고요함이 조화를 이룬 신라 석조 예술의 진수나 다름없습니다.
국가문화유산 국보로서
적인선사 승탑의 가치
완벽한 보존 상태
적인선사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승탑 가운데는 기단부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요소가 손상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기록이 명확합니다.
승탑 옆에 세워져 있던 비문에는 적인선사의 생몰 연대(785~861년)와 탑의 건립 시기(861년)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탑을 통해 다른 팔각원당형 부도탑들에 대한 세워진 연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빼어난 예술적 가치
탑은 전체적인 비례감과 조형미가 뛰어나고 각 부분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하대석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고, 탑신석 각 면 좌우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인방 등 목부재를 본떠 새긴 점이 독특합니다. 옥개석은 전통 한옥의 처마 곡선과 목부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당대 최고의 석공이 시공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뛰어납니다. 역동적인 조각 기법과 절제된 조각 기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빼어난 예술적 가치를 보여줍니다.
탑전 시설의 흔적
기단 주변 4개의 주초석은 신라시대에 건립된 승탑 중 유일하게 예불 행위를 위한 탑전(塔殿, 탑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불하기 위한 건축물) 시설을 갖추었던 흔적으로 추정되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이는 당시 승려에 대한 신앙적 행위와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곡성 태안사에는 적인선사 탑 외에도 광자대사 승탑, 광자대사 탑비, 태안사 대바라, 태안사 동종, 태안사 일주문 등이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돼 있어, 산사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천년 고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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