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전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2코스ㅣ기장의 아홉 포구, 그 포굿길을 따라 해변을 거닐다
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두 번째 코스로
"기장의 아홉 포구, 그 포굿길을 따라 해변을 거닐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2 코스 |
송정 가을포와 공수마을 ▶ 시랑리의 포구마을 ▶ 연화리와 대변리 ▶ 죽성리의 명물을 만끽하다 ▶ 「갯마을」과 일광해수욕장 그리고 다시마 ▶ 문오성(文五成) 다섯 마을을 찾아서 ▶ 장안읍의 바닷가 마을 |
기장은 바다의 고장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위협과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기장 포구 사람들은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의연히 삶의 터전으로 삼아 왔는데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온 세월이 점점 쌓여 끝내 하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코스 2ㅣ기장의 아홉 포구,
그 포굿길을 따라 해변을 거닐다
송정 가을포와
공수마을
기장의 아홉 포구 |
조선시대의 사료에는 기장현의 포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두모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기에 이을포·가을포·동백포·공수포·기포·무지포가 더하여 기록되어 있다. 1832년 출간된 『기장현읍지』에는 두모포가 빠지고독이포·월내포·화사을포가 추가되어 있는데, 총 아홉개의 포구가 된다.
이 아홉 개의 포구가 기장을 대표하는 ‘기장 9포’로 꼽히게 되었다. 이를 남쪽부터 정리하면 아래 표와 그림과 같다. 다만,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있어서 가을포나 이을포가 빠지고 두모포와 항리포가 들어가기도 한다.
요즘은 포구를 항구라고 부르는 일이 더 많다. 기장군 홈페이지를 보면 기장 바닷가에는 현재 열일곱 개의 어항이 있다. 이를 남쪽부터 북쪽으로 정렬하면 다음과 같다.
공수항 - 동암항 - 서암항 - 신암항 - 대변항 - 월전항 - 두호항 - 학리항 - 이천항 - 이동항 - 동백항 - 신평항 - 칠암항 - 중동항 - 월내항 - 임랑항 - 길천항 |
송정 가을포 |
송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송정동은 원래 기장에 속한 땅이었다.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가는 길을 생각하면 느낄 수 있겠지만,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는 신곡산이 있어 지형적으로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에 송정 지역은 동래부의 영역이 아니라 현재 기장읍 시랑리의 석산·당사마을과 함께 기장현 남면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면서 당시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가 해운대출장소 관할로 들어갔던 것이다. ‘송정동’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66년의 일이다. 1980년에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면서 우리가 아는 해운대구 송정동이 되었으며, 1996년에 송정터널이 뚫리면서 송정 지역이 해운대 신도시와의 접근성이 크게 좋아지게 되었다.
해수욕장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기장 9포의 하나인 가을포로 불리는 어촌마을이었다. 현재도 죽도 근처에 송정항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항구를 감싸고 있는 방파제 양쪽 끝에는 두 개의 등대가 마련되어 있다.
가을포’라는 명칭은 혹은 ‘가래포’라고도 표기된다. 이 명칭은 갈대가 많아서 그렇게 붙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갈대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송정항의 입지를 보면 송정천의 하구에 위치하므로 하천변에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현재도 송정항 근처에는 송일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고, 일출 명소로 꼽히고 있다.
공수마을과 공수포 |
공수마을은 기장군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기장읍시랑리에 속한다. 송정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이웃 마을이라 필자도송정에 놀러 왔다가 공수마을까지 산책을 다니곤 하였다. 송정천에서 공수마을로 넘어가는 길에 ‘공수고개’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원래 공수마을은 기장 9포의 하나로 꼽히는 공수포가 있던 어촌마을이었다. 공수마을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공수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에도 공수전리라는 지명이 있다. 공수포의 옛 이름은 ‘비오개’인데, 비옥포나 비오포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비오개’라는 지명은 철새인 비오리가 많이 몰려드는 포구(개)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공수마을은 기장의 명물인 곰장어 짚불구이의 원조로 유명하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집이 공수마을에 있고, 이외에도 곰장어 요리를 잘하는 가게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금 기장 해안로를 따라 공수마을을 지나가면 큰 길가에는 어촌 느낌은 찾기 힘들다. 21세기 들어 해변과 도로 주변에 펜션과 커피전문점이 크게 늘었으며, 도로를 중심으로 원래 마을 건너편에 거대한 펜션 촌이 형성되어 있다.
시랑리의
포구마을
용궁사와 시랑대 석각 |
해동용궁사는 시랑대 근처 암석해안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이 절은 전통이 있는 사찰로는 보기 힘들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특색 있는 석물이 있는 장소로서 유명하다. 문헌이나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절이 지어진 것은 1970년대 무렵으로 보이는데, 주변의 절경과 기복신앙의 명소로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 사찰로 손꼽히게 되었다.
동해안 암벽에 위치하는 점이나 입구에 있는 ‘관음성지’ 비석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양양 낙산사와 같은 관음 사찰에서 시작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용궁사를 찾는 이유는 대개 시랑대에 가기 위해서인데 시랑대는 해변에 있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원래 이곳의 명칭은 ‘원앙대’였다. 원앙대에는 「미랑스님과 용녀」, 「장사와 독룡」 등 주로 용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동암마을과 오랑대의 용왕단 |
지장보살상과 여러 개의 돌탑을 지나면 ‘홍룡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지나면 해안을 따라 400m 남짓 산책로가 뚫려 있다. 해안 길을 따라가다 보면 국립수산과학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다.
동암마을은 동암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어촌마을이다. 기장해안로와 접하는 마을 입구 쪽은 용궁사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거대한 식당촌이 형성되어 있고, 바닷가 쪽에만 항구마을다운 정취가 조금 남아 있다.
그나마 지금 이 마을의 풍경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외국계 유명 호텔의 위용이다. 처음 이 호텔이 지어질 때는 마을과 해안의 풍광을 해치는 개발이라는 비난을 들었는데,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휴양 명소가 되었다.
동암마을에서 호텔 앞으로 해안을 따라 동암해안길이 정비되었다. 과거에는 해안 군사시설로 인해 이 길이 막혀 있었지만 군부대 측의 양해로 처음에 좁은 오솔길이 뚫렸고, 지금은 제법 잘 정비된 산책로 조성이 됐다.
동암산책로를 따라가다가 군부대를 지나면 바닷가 바위 위에 작은 기와집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근처를 오랑대라고 한다. 이 이름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다섯 선비가 이곳에 놀러 왔다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연화리와
대변리
서암항과 신암항의 이색 등대 |
오랑대를 지나면 동암해안길은 다시 기장해안로와 합류하고, 곧 연화리로 접어든다. 연화리에는 서암항과 신암항이 있다. 연화리 일대는 횟집촌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또 다섯 개의 특색 있는 등대가 있는데 서암항의 남북방파제등대는 각각 ‘젖병등대’, ‘닭벼슬등대’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대변항의 기장대멸치 |
신암항을 지나면 커다란 만이 나타나고, 맞은편에 수많은 어선과 커다란 등대, 창고시설이 보인다. 여기가 대변항이다. 신암항에서 대변항에 이르는 곳이 바로 옛적 기장 9포의 하나인 무지포이다.
현재 연화리와 대변리 일대는 횟집촌으로 서로 연결되어 외부인이 보기에는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변은 기장 멸치 어업의 메카이기 때문에 멸치잡이 시설이 되어 있는 어선들이 줄이어 있어서 그 풍경이 다른 항구마을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척화비와 박순천 생가 |
대변항 바로 가까이에는 용암초등학교가 있다. 이 초등학교는 항구 바로 곁에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지만, 두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교정에 있는 척화비이다.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전국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 척화비는 원래는 방파제 안쪽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에 항만을 축조하면서 바다에 빠뜨려졌다. 1947년 마을 청년들이 이를 건져서 대변항 어판장 뒤쪽 축대에 세웠다가 2005년 다시 현재의 용암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긴 것이다.
대변 지역 출신 인물로 정치가 박순천이 있다. 어릴 때는 남장을 하고 서당에 다녔다고 하며, 부산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석방 후에도 감시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순천댁’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후에 ‘박순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의정활동을 하며 여권과 민주화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내었고, 5·16군사정변 이후 붕괴된 민주당 재건에 앞장서서 1963년 총재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5선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마치고 1983년 86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죽성리의 명물을
만끽하다
황학대와 어사암 |
황학대는 두호항 인근에 솟아 있는 바위 언덕이다. 바위의 형상이 황학이 바다를 향해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섬이었다고 하는데 죽성천 하구의 퇴적으로 육지가 되었다. 언덕 위에는 정자가 있어서 포구 근처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 뒤편에 있는 언덕에서 보면 황학대와 정자 자체가 포구의 풍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1618년 고산 윤선도가 경원에서 기장으로 이배되어 6년을 지냈을 때 죽성에서 머물렀다고 하며, 황학대에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어사암은 죽성리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바위이다. 원래 이름은 매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 ‘어사암’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19세기에 암행어사로 기장을 찾은 이도재라는 인물 때문이다. 1883년 독이포(현재의 문동리)에 있는 해창에서 곡식을 실은 배가 부산포를 향해 운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 매바위에서 좌초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이곳은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고 밀물이 되면 아래쪽이 바다에 잠기는데 테트라포드 위를 건너다녀야 해서 직접 가보는 것은 위험하다.
「갯마을」과 일광해수욕장
그리고 다시마
학리와 삼성리 |
기장 해안 여행길 북쪽 구간의 시작은 일광읍 학리이다. 학리는 조선시대에는 ‘항리포’라고 불렸던 어촌마을로, 죽성천의 북쪽과 일광해수욕장 남쪽 사이에 반도처럼 튀어나온 곶이다. 학리와 맞은편 이천리 사이에는 일광해수욕장을 포함하는 만이 형성되어 있는데, 방파제에서 보는 풍경이 뛰어나다. 학리마을은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삼성리는 일광읍의 중심지로 행정복지센터와 일광해수욕장이 이곳에 있다. 또 기장읍에서 일광으로 들어오는 입구이고 학리의 유일한 출입구이며, 이천-이동-동백-칠암-문동으로 이어지는 일광로의 출발점인 교통의 요지이다. 삼성리에는 201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의 주거지 개발이 진행되었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2022년에는 드디어 일광면이 일광읍으로 승격하였다.
이천항과 이동항 |
일광천 하구에 다다르면 별님공원 입구에 난계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라는 비석이 서 있고, 그 앞에 일광천 위로 강송교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일광천을 건너면 옛 기장 9포의 하나인 이을포가 있었던 이천항으로 갈 수 있다.
이천항 역시 건너편으로 학리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좋은 경치를 가지고 있고, 어업과 양식업이 성하다.
또 동명의 오영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갯마을」(1965)의 촬영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천항이다. 이 작품은 젊어 남편을 잃고 홀로된 갯마을 여성의 인생역정을 그리고 있다. 일광에서는 매년 여름 갯마을 축제를 개최하는데, 원래 마당극 축제로 출발한 만큼 마당극 공연을 하고 「갯마을」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이동항은 조선시대에 기포라고 불리었으며, 기장 9포 중 하나이다. 기포는 여기서 나는 자갈돌로 만든 검은 바둑알이 특산품이었기 때
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동항은 관광지보다는 수산업 중심지의 성격이 강한데 기장은 서해안의 완도와 더불어 미역과 다시마 산지로 전국에 이름이 높은 곳이다.
문오성(文五成)
다섯 마을을 찾아서
동백항과 신평소공원의 윷판대 |
동백항은 기장 9포의 하나인 동백포가 있었던 곳이다. 동백천 하구를 중심으로 어항이 형성되어 있고, 항구를 감싸는 방파제 끝에는 희고 붉은 등대가 세워져 있는 전형적인 항구의 모습이다.
다시 일광로를 따라 북상하니 신평리로 접어들었는데 신평리는 신평소공원으로 유명하다. 이 공원은 2003년 조성된 후 여러 차례 정비를 거쳐 2020년 무렵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금은 배의 이물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있고 주변에 산책로에 데크길이 놓여 잘 정비된 느낌을 준다. 공원이 생기기 전까지 이 해안은 ‘윷판대’로 유명했다. 윷판대 주변에는 악어 등처럼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 바다를 향해 평행하게 여러 갈래 비죽비죽 뻗어 있다. 기장 지역에는 이런 형태의 지형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윷판대는 특히 두드러진다.
칠암의 등대와 횟집 마을 |
신평항과 칠암항 사이로 칠암항의 남방파제가 있는데, 남방파제 끝에는 칠암의 명물 중 하나인 야구등대가 있다. 항구에서 보면 야구등대가 바로 앞에 있지만, 등대까지 도착하려면 방파제 길을 제법 멀리 걸어야 한다. 이 등대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생김새 자체가 야구방망이와 야구공을 형상화하여 멀리서도 눈에 띈다.
등대 내부에는 올림픽 우승에 대한 내용과 이제는 전설로 존재하는 고(故) 최동원 선수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 야구등대 옆 방파제에는 빨간 갈매기등대와 노란 붕장어등대도 서 있다.
칠암항은 기장에서 손꼽히는 횟집 마을이다. 해변을 따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횟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각종 회나 장어구이, 대게찜 등 온갖 종류의 해산물 요리를 취급하지만, 특별히 유명한 명물을 하나 꼽자면 붕장어를 들 수 있다. 신평리 윷판대 모습 정영현 칠암 아나고’라는 명칭이 부산 지역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통할 정도이다.
문오동과 중동항 |
문중리로 들어가면 조선시대에 기장 9포 중 하나인 독이포가 있었던 곳이며 그 부근에 해창이 있었다. 독이포는 혹은 ‘독포(禿浦)’라고도 하는데, ‘대머리’라는 뜻이다. 인근에 민둥산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일광읍 북쪽의 5개 마을을 합쳐서 ‘문오동’ 혹은 ‘문오성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문중리에는 문중항, 문동리에는 문동항이라는 소규모 항구가 각각 있었다. 그런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1년 두 항구를 합쳐 하나의 큰 항구로 정비했다. 명칭도 합쳐서 ‘중동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동항에서는 미역·다시마·성게 양식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항구 일대는 칠암과 연결되어 횟집과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다.
장안읍의
바닷가 마을
효암리 이주민마을과 박태준기념관 |
과거에는 장고개를 넘고 좌광천을 지나야 장안읍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좌광천 하구에 임랑교가 놓여서 해안 길을 따라서도 장안읍에 이를수 있다. 임랑교를 넘어 장안읍 바닷가 최남단에 있는 마을이 임랑리이다. 효암리 이주민마을은 기장군 해변가에 있는 마을 중 최북단에 있는 마을로 좌광천 변에 위치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2001년 마을을 비워주는 보상으로 효암리 마을 주민들은 임랑리의 좌광천 주변으로 이주했다.
이었던 것이다.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창립자로 유명한 고(故) 박태준 회장의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2021년에 정식으로 개관했다. 임랑 출신의 인물인 박태준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그의 생가터를 포함하고 있다.
임랑포와 임랑해수욕장 |
임랑포는 기장 9포에는 들지 못하지만, 『경상도지리지』에서 임을랑포 봉화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늦어도 조선 전기에는 포구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을랑포는 임랑포의 다른 표기인데 정확한 뜻은 알기 힘들다.
현재 임랑은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고, 해변 북쪽에 임랑항이 있다. 하지만 임랑포 봉수대와 임랑포왜성의 위치로 봤을 때 조선시대의 임랑포구는 좌광천 하구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월내포와 보부상 배상기 |
월내리는 기장 9포 중 하나인 월내포가 있었던 곳이다. 또 2·7장인 월내장이 번성하였는데, 현재는 월내역 주변에 위치한다. 월내 지역을 지금 보기에는 기장 읍내에서 보면 제법 외진 곳에 위치해 있고, 마을 규모도 특별히 크지 않고, 어업이 크게 발달한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제법 소도시다운 느낌을 받게 되는데, 아마도 근처에 고리원자력발전소와 장안산업단지가 있고 거기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월내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월내는 옛적 월내포에서 이어지는 어촌의 성격은 점점 약해지고 외부에서 이주해온 직장인들의 주거지라는 성격이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리 화사을포와 길천항 |
기장 9포 중 남은 하나는 화사을포 혹은 화포이다. ‘화사을포’는 ‘불살개’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현재 장안읍 고리에 위치했던 포구였는데, 지금은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영역에 포함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길천리는 월내에서 장안천을 건너면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의 들을 ‘질고지’라고 했고, 그 사이로 흐르는 하천을 ‘질곶이천’이라고 했는데 이 하천에서 ‘길천’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길천항은 길천리에 있는 항구로, 말하자면 기장군 최북단의 항구인 동시에 고리원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라고 할 수 있다. 고리에 너무 가깝다 보니 월내에서 보이던 원전이 길천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항구는 협소하지만 방파제가 갖추어져 있고, 한쪽에 선박을 수리하기 위한 시설인 건선거도 보인다. 길천항에서 이루어지는 수산업은 주로 양식업이다. 길천항은 관광지가 된 다른 포구마을과 달리 포구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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