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전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 형평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 | 시민명예기자
사람들은 고기와 가죽은 필요했지만,
짐승을 잡는 우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형평사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2023년 5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공평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 특별전 영상물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외치던 순간>의 글귀가
아직도 귓가를 울립니다.
근대 인권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 운동이기도 합니다.
백정이란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맞먹는
천민 집단이었습니다.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여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습니다.
백정은 고려시대에
양수척 또는 화척을 불리던 사람들로
유목과 수렵 생활한 거란인이나
여진인에 그 유래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일정한 거주지를 두지 않고 사냥하거나
버드나무로 만든 유기를 만들어 팔면서
생업을 유지했는데 천민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백정에 관한 차별은
사라졌다고 해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고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호적에는 도살업 하는 자라는 뜻의
<도한(屠漢)>이라는 글자가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억압과 차별 속에 신음하던
천민 신분이던 백정들이
1923년 4월 24일 직접 ‘저울’
(저울대 형(衡), 평평할 평(平)) 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습니다.
양반 출신이지만 사회 변혁에 나섰던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
·천석구(千錫九) 등과
백정 출신으로 차별을 타파하려던
장지필(張志弼), 이학찬(李學贊) 등이 주도했습니다.
1923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형평운동을 계급 타파 운동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주(晋州)에형평사발기(衡平社發起)
계급타파(階級打破)를절규(絕呌)하는
백정사회(白丁社會) 진주(晋州)에
형평사발기(衡平社發起)
계급타파(階級打破)를 절규(絕呌)하는
백정사회(白丁社會)
우리도이세상사람의일분자이니
압박멸시게급을타파하자는운동~
1935년 명칭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형평운동은 13년간 지속된 대표적인 인권운동입니다.
한때는 전국의 단위 조직체가 1백62개,
활동가는 9천6백88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진주에는 형평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진주 시내로 나가면 구도심답게
그 발자취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중앙시장 근처 옛 진주극장.
임대와 매각을 알리는 걸개가 걸려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진주극장(당시 진주좌(晉州座))은
여러 사람이 뜻을 모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습니다.
한쪽 모퉁이에 스테인리스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여기는 1923년 5월 13일에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이다.
여러 곳의 지도자들이 모인 이 행사로
말미암아 형평사의 활동은 전
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백정의 신분 차별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형평운동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인권운동의 한 선구지요, 금자탑이다.
몰에이지1030 주식회사가
쇼핑몰 건물을 신축하면서
형평운동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건축조형물에 그 당시의 비문을 옮겨
기록했다고 합니다.
손톱깎이를 닮은 메뚜기를 형상화해
풀잎에 맺힌 이슬과 조화를 이루는 모양새입니다.
풀잎에서 굴러 내린 이슬에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을 상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듯합니다.
옛 진주극장을 지나 진주중학교 옆에 있는
진주교회를 찾았습니다.
3.1만세운동 때 진주 하늘을 울렸던
종이 걸려 있습니다.
옆으로 진주교회 비전관이 있습니다.
건물 곁에는 작은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본 교회’라는
안내판이 우리를 반깁니다.
1909년 라이올(한국명 나대벽) 선교사는
한때 천대받던 백정 신자들을
따로 예배드리게 하는 것은
평등한 인권사상에 어긋난다며,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일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지만,
스콜스와 켈리 선교사의 설득 끝에
모두가 다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믿음을
다시금 확인한 순간이었으며,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그로부터 14년 후
형평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진주교회에서
다시금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진주 8경 중 하나인 뒤벼리 풍경이 곱습니다.
봄바람에 수양버들이 한들한들 초록빛 춤을 춥니다.
강변 야외무대 근처 <청소년 푸른 쉼터>라는
표지석 주위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습니다.
조형물들 사이로 앞으로 나아가는
배 형상의 조형물이 나옵니다.
두 손을 맞잡은 남녀 조형물이 나오는
형평운동기념탑입니다.
탑의 한쪽 옆면에는 “인간 존엄, 인간 사랑”,
다른 한쪽 옆면에는 “자유 평등, 형평 정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공평(公平)은
사회(社會)의 근본(根本)이요,
애정(愛情)은 인류(人類)의
본량(本梁, 본래 타고난 양심)이라.
라는 빗돌에서 형평사 창립문이
인권운동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두 줄기의 나란한 기둥이여/
영원히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높이 찬양하여라./
칠십 수년 전 이곳 진주의 선각자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사랑 정신을 드높여 선포하였다./
우리는 모두 존경할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생명의 존엄 그 자체이다./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그녀도, 그이도, 모두/
이 평등의 문을 나서라./
우리는 모두 두 손을 꼭 잡고 저 남강 앞에/
저 태양을 향해 평등과
자유의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1996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일에 맞춰
형평운동 기념탑이
진주성 촉석문(동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이 탑은 1,500여 명의 회원과
진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글씨는 솔뫼 천갑녕 선생,
조각은 심정수 작가가 맡았습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던
옛 진주극장 앞에 세우려 했지만,
터가 좁고 땅값이 비싸
진주성 동문 앞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996년 진주성 외성 터에 세운 이유는
천민 신분이라 진주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백정들의 혼을 달래고자 했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
진주대첩 역사공원 조성 사업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어
지금까지 이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 본 포스팅은 진주시 시민명예기자가 작성한 글로서 진주시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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